독서이야기/익어가는 하루(필사)

처용 아내의 노래 - 문정희

물빛향기 2020. 6. 21. 22:19

처용 아내의 노래                - 문정희

 

아직도 저를 간통녀로 알고 계시나요.

허긴 천년동안 이 땅은 남자들 세상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서라벌엔 참 눈물겨운 게 많아요.

석불 앞에 여인들이 기도 올리면

한겨울에 꽃비가 오기도 하고

쇠로 만든 종소리 속에

어린 딸의 울음이 살아 있기도 하답니다.

우리는 워낙 금슬 좋기로 소문난 부부

하지만 저는 원래 약골인 데다 몸엔 늘 이슬이 비쳐

부부 사이를 만 리나 떼어 놓았지요.

아시다시피 제 남편 처용랑은 기운찬 사내,

제가 안고 있는 병을 샛서방처럼이나 미워했다오.

그날 밤도 자리 펴고 막 누우려다

아직도 몸을 하는 저를 보고 사립 밖으로 뛰어나가

한바탕 춤을 추더라구요.

그이가 달빛 속에 춤을 추고 있을 때

마침 저는 설핏 잠이 들었는데

아마도 제가 끌어안은 개짐이

털 난 역신처럼 보였던가 봐요.

그래서 한바탕 또 노래를 불렀는데

그것이 바로 처용가랍니다.

사람들은 역신과 자고 있는 아내를 보고도

노래 부르고 춤을 추는 처용의

여유와 담대와 관용을 기리며

그날부터 부엌이건 우물이건 질병이 도는 곳에

처용가를 써 붙이고 야단이지만

사실 그날 밤 제가 안고 뒹군 것은

한 달에 한 번 여자를 찾아오는

삼신할머니의 빨간 몸 손님이었던 건

누구보다 제 남편 처용랑이 잘 알아요.

이 땅. 천 년의 남자들만 모를 뿐

천 년동안 처용가를 부르며 낄낄대고 웃을 뿐

 

    - 시집<남자를 위하여>(민음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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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짐 : 여자가 월경 때 샅에 차던 헝겊

* 샛서방 : 남편이 있는 여자가 남편 몰래 관계를 갖는 남자

* 설핏 : 풋잠이나 얕은 잠에 빠져든 모양을 나타내는 말

* 처용가 : 신라 헌강왕 때, 처용이 지은 팔구체 향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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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경험을 통해서 현재의 변화하는

요구에 맞게 계속 조정하는 데서 전통이 생긴다."  - T.S 엘리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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