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이야기/익어가는 하루(필사)

시어(詩語) 가게에서 - 최승호

물빛향기 2020. 6. 22. 22:27

시어(詩語) 가게에서        - 최승호

 

수평선 900

구름 500

아지랑이 1000

저녁 어스름 800

300

마음 500

나라 100

풀잎 400

아스팔트 100

빌딩 100

노을 900

바다 700

고래 600

욕망 100

하나님 200

시궁쥐 400

절간 200

이슬 900

천둥 500

미소 800

깨달음 100

발톱 300

배꼽 1000

따오기 900

북회귀선 400

변기 200

물푸레나무 700

침대 300

폐허 600

섹스 100

냉이꽃 900

허무 200

밤 두 시 800

개똥 900

다이아몬드

늑대 700

공룡 400

여울 1000

하루살이 900

바보 800

귀뿔 100

은하수 600

달빛 900

조개껍질 300

모래톱 1000

파도 소리 700

200

 

저희 詩語가게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날마다 좋은 시() 쓰세요.

 

- 계간<시평> 2005년 가을호

 

 

   시는 시인이 스스로 시어를 만들어 쓰는 게 아니라 이미 있는 낱말 가운데 골라 써야 함은 당연한 노릇이다. 시의 제조공정은 조금씩 달라도 대체로 한 편의 시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먼저 주제와 소재에 따라 적합한 시어를 선택한 다음 그 어휘들을 적절한 의미 단락으로 결합해 가는 과정을 거친다. 시어에도 시인들이 즐겨 찾는 것이 있고 잘 팔리지 않는 것이 있다. 그렇다고 써먹지 못할 시어란 없고 시어의 값이 수요공급의 원리에 따라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

   이 시어 가게의 메뉴판은 그 어떤 기준이나 구분 없이 뒤죽박죽 나열되었다. 일단 가격대별로 정리해서 다시 보자.

 

     1000원 아지랑이, 배꼽, 여울/

      900원 수평선, 노을, 이슬, 따오기, 냉이꽃, 개똥, 하루살이/

      800원 저녁 어스름, 미소, 밤 두 시/ 700원 바다, 물푸레나무, 늑대, 파도 소리/

      600원 고래, 폐허, 은하수/ 500원 구름, 마음, 천둥/ 400원 시궁쥐, 북회귀선, 공룡/

      300원 길, 발톱, 침대, 조개껍질/ 200원 다이아몬드, 하나님, 절간, 변기, 허무, /

      100원 나라, 빌딩, 욕망, 아스팔트, 깨달음, 섹스, 쥐뿔

 

   우선 100200원 하는 저렴한 시어들을 보면 대개 현실에서 무게가 좀 나가는 것들이다. 자본주의적이고 관념적이며 쾌락적이다. 그것들만 모아 아무렇게나 말을 한번 만들어보자. ‘가진 것 없는 나라에 태어나 쥐뿔도 없는 놈이 빌딩을 높이 세우고자 아스팔트 위에서 욕망만 섹스처럼 부풀렸으나 도무지 불가하다는 걸 깨닫는데 평생이 걸렸다

 

   ‘다이아몬드를 위해 하나님도 찾고 절간도 찾았으나 결국 섬 같은 변기 위에 앉아 허무만 배설하고 있다시에 써먹지 못할 말은 없다지만 역시 이런 시어들의 조합만으론 난삽한 느낌이 없지 않다. 그래서 시는 아름답거나 감동적이어야 한다는 일반의 보편적 인식이 아주 틀리지는 않나보다. 수요공급의 원리가 작동하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서정적 시어가 잘 팔려나가고 높은 값을 받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아름다운 표현은 미적 쾌감을 불러일으키고 그 쾌감은 독자들의 정서를 한껏 고양시켜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값나가고 좋은 시어라 해도 아무 데나 마구잡이로 갖다 붙여서는 감동은커녕 독자를 식상케 할 수도 있다. 우아한 시어 몇 개의 조합으로 아름다운 글이 될 수 없으며 입맛이 까다로운 독자를 만족시키기도 어렵다.

 

   현실의 일상들이 아름답고 고상하지만도 않듯이 일상어 또한 그렇다. 시에서 쓰이는 말도 거의 일상어일 수밖에 없다. 일상어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시를 쓸 수 있어야 한다

 

      - 권순진 시인 (2016. 10. 05)

 

단상)
시어(詩語)가게의 광고를 보고서

 

새벽에 길을 나섰다.

풀잎에 이슬이 맺쳐서 영롱하다.

미소로 인사하고

냉이꽃과 작은 여울을 지나

하루살이처럼 열심히 일하고,

오늘도

저녁 어스름에 달빛을 보며

하루를 마감한다.

 

구입품목 : 길 300월, 풀잎 400월, 이슬 900원, 미소 800원, 냉이꽃 900원, 여울 1,000원, 달빛, 900원, 저녁 어스름 800원, 하루살이 900원  === 합 9 품목 6,9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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