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詩語) 가게에서 - 최승호
수평선 900원
구름 500원
아지랑이 1000원
저녁 어스름 800원
길 300원
마음 500원
나라 100원
풀잎 400원
아스팔트 100원
빌딩 100원
노을 900원
바다 700원
고래 600원
욕망 100
하나님 200원
시궁쥐 400원
절간 200원
이슬 900원
천둥 500
미소 800원
깨달음 100원
발톱 300원
배꼽 1000원
따오기 900
북회귀선 400원
변기 200원
물푸레나무 700원
침대 300원
폐허 600원
섹스 100원
냉이꽃 900원
허무 200원
밤 두 시 800원
개똥 900원
다이아몬드원
늑대 700원
공룡 400원
여울 1000원
하루살이 900원
바보 800원
귀뿔 100원
은하수 600원
달빛 900원
조개껍질 300원
모래톱 1000원
파도 소리 700
섬 200원
저희 詩語가게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날마다 좋은 시(詩) 쓰세요.
- 계간<시평> 2005년 가을호
시는 시인이 스스로 시어를 만들어 쓰는 게 아니라 이미 있는 낱말 가운데 골라 써야 함은 당연한 노릇이다. 시의 제조공정은 조금씩 달라도 대체로 한 편의 시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먼저 주제와 소재에 따라 적합한 시어를 선택한 다음 그 어휘들을 적절한 의미 단락으로 결합해 가는 과정을 거친다. 시어에도 시인들이 즐겨 찾는 것이 있고 잘 팔리지 않는 것이 있다. 그렇다고 써먹지 못할 시어란 없고 시어의 값이 수요공급의 원리에 따라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
이 시어 가게의 메뉴판은 그 어떤 기준이나 구분 없이 뒤죽박죽 나열되었다. 일단 가격대별로 정리해서 다시 보자.
1000원 아지랑이, 배꼽, 여울/
900원 수평선, 노을, 이슬, 따오기, 냉이꽃, 개똥, 하루살이/
800원 저녁 어스름, 미소, 밤 두 시/ 700원 바다, 물푸레나무, 늑대, 파도 소리/
600원 고래, 폐허, 은하수/ 500원 구름, 마음, 천둥/ 400원 시궁쥐, 북회귀선, 공룡/
300원 길, 발톱, 침대, 조개껍질/ 200원 다이아몬드, 하나님, 절간, 변기, 허무, 섬/
100원 나라, 빌딩, 욕망, 아스팔트, 깨달음, 섹스, 쥐뿔
우선 100원 200원 하는 저렴한 시어들을 보면 대개 현실에서 무게가 좀 나가는 것들이다. 자본주의적이고 관념적이며 쾌락적이다. 그것들만 모아 아무렇게나 말을 한번 만들어보자. ‘가진 것 없는 나라에 태어나 쥐뿔도 없는 놈이 빌딩을 높이 세우고자 아스팔트 위에서 욕망만 섹스처럼 부풀렸으나 도무지 불가하다는 걸 깨닫는데 평생이 걸렸다’
‘다이아몬드를 위해 하나님도 찾고 절간도 찾았으나 결국 섬 같은 변기 위에 앉아 허무만 배설하고 있다’ 시에 써먹지 못할 말은 없다지만 역시 이런 시어들의 조합만으론 난삽한 느낌이 없지 않다. 그래서 시는 아름답거나 감동적이어야 한다는 일반의 보편적 인식이 아주 틀리지는 않나보다. 수요공급의 원리가 작동하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서정적 시어가 잘 팔려나가고 높은 값을 받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아름다운 표현은 미적 쾌감을 불러일으키고 그 쾌감은 독자들의 정서를 한껏 고양시켜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값나가고 좋은 시어라 해도 아무 데나 마구잡이로 갖다 붙여서는 감동은커녕 독자를 식상케 할 수도 있다. 우아한 시어 몇 개의 조합으로 아름다운 글이 될 수 없으며 입맛이 까다로운 독자를 만족시키기도 어렵다.
현실의 일상들이 아름답고 고상하지만도 않듯이 일상어 또한 그렇다. 시에서 쓰이는 말도 거의 일상어일 수밖에 없다. 일상어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시를 쓸 수 있어야 한다
- 권순진 시인 (2016. 10. 05)
단상)
시어(詩語)가게의 광고를 보고서
새벽에 길을 나섰다.
풀잎에 이슬이 맺쳐서 영롱하다.
미소로 인사하고
냉이꽃과 작은 여울을 지나
하루살이처럼 열심히 일하고,
오늘도
저녁 어스름에 달빛을 보며
하루를 마감한다.
구입품목 : 길 300월, 풀잎 400월, 이슬 900원, 미소 800원, 냉이꽃 900원, 여울 1,000원, 달빛, 900원, 저녁 어스름 800원, 하루살이 900원 === 합 9 품목 6,9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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