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에 대하여 - 이성복
때로 나무들은 아래로 내려가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나무의 몸통뿐만 아니라 가지도 잎새도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고 싶을 것이다 무슨 부끄러운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왼종일 마냥 서 있는 것이 부담스러울 때가 있을 것이다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제 뿌리가 엉켜 있는 곳이 얼마나 어두운지 알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몸통과 가지와 잎새를 고스란히 제 뿌리 밑에 묻어 두고, 언젠가 두고 온 하늘 아래 다시 서 보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현대문학> 2008년 5월호 / 시집<래여애반다라>(문학과 지성사, 2013)
♥ 나무에 대하여 - 이성복
처서가 지나면 나무들은 생장을 멈추기 시작한다고 한다. 위로만 솟아오르려는 상승의 기운을 접고 비로소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여름은 너무 밟고 뜨거웠다고 나무들도 서늘해지려고 하는 것이다. 햇볕이 건드려도 꿈쩍하지 않고, 바람이 술 먹으러 가자고 해도 흔들리지 않는다. 이런 침잠의 시간이 없다면 나무들의 키는 벌써 하늘에 닿았거나 혹한의 겨울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오래된 잘 늙은 나무는 이렇게 평생 상승과 하강을 되풀이하면서 마음이 깊어진다. 아래를 내려다볼 줄 아는 눈, 나무에도 분명히 있다. - 안도현 시인
나무에 대하여 - 정호승
나는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가 더 아름답다
곧은 나무의 그림자보다
굽은 나무의 그림자가 더 사랑스럽다
함박눈도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에 더 많이 쌓인다
그늘도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가 더 그늘져
잠들고 싶은 사람들이 찾아와 잠이 든다
새들도 곧은 나무가지보다
굽은 나무가지에 더 많이 날아와 앉는다
곧은 나무는 자기의 그림자가
구부러지는 것을 싫어하나
고통의 무게를 견딜줄 아는
굽은 나무는 자기의 그림자가
구부러지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 정호승 시집<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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