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6일차 : '벌레 먹은 채소' <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난다, 2016>
♣ 필사할 본문
▮ 소금과 죽음
도시 사람들은 자연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자연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도 없다. 도시민들은 늘 ‘자연산’을 구하지만 벌레 먹은 소채에 손을 내밀치 않는다. 자연에는 삶과 함께 죽음이 깃들어 있다. 도시민들은 그 죽음을 견디지 못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거처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철저하게 막아내려 한다. 그러나 죽음을 끌어안지 않는 삶은 없기에, 죽음을 막다 보면 결과적으로 삶까지도 막아버린다. 죽음을 견디지 못하는 곳에는 죽음만 남는다. 사람들이 좋은 소금을 산답시고, 우리 고향 마을의 표현을 빌리자면, ‘죽은 소금’을 고르게 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같은 이치다. 살아 있는 삶, 다시 말해서 죽음이 함께 깃들어 있는 삶을 고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좋은 식품을 고리기 위해서도, 사람 사는 동네에 이른바 혐오시설이 들어서는 것을 용납하기 위해서도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 고향 비금 사람들이 염전에 장판과 타이를 걷어낼 때도 그런 용기가 필요했다.
내 이야기로 다시 돌아오면, ‘특목초’를 졸업한 나는 염부가 되기는커녕, 손에 흙을 묻히지 않고 짠물에 발을 적시지 않고 살기를 바라는 집안 어른들의 소망대로 책상 앞에서 살게 되었다. 그러나 「죽음의 춤」 같은 시에서 해방되지는 못했다.(2009)
- p.21
■ 문장 분석
- 저자의 고향은 전라남도 신안구 작은 섬 비금도라고 합니다.
- 비금도는 인구가 3천이 조금 넘는 낙도지만 바둑기사 이세돌의 고향이며, 시금치 ‘섬초’와 국내에서 가장 질이 좋은 천일염 ‘비금소금’의 생산지라고 하네요.
- ‘가장 좋은 천일염은 맨 흙에서 얻어내는 ‘토판염’이지만, 소금에 흙빛이 남아 있어 시장에서 팔리지 않았다’(p.20)라며 안타까움을 나타냅니다.
- 필사문은 (p.20)부터 이어진 내용입니다.
- ‘도시민들은 늘 ‘자연산’을 구하지만 벌레 먹은 소채에 손을 내밀지는 않는다.’ 어찌보면 모순이겠네요. 자연산을 구하지만 벌레 먹은 건 안 사는 행동이요.
- ‘자연에는 삶과 함께 죽음이 깃들어 있다.’ 삶과 죽음을 언급하며 인생순리를 언급합니다.
- ‘도시민들은 그 죽음을 견디지 못한다.’ 죽음을 외면하고픈 도시민의 심리를 꼬집습니다.
- ‘그러나 죽음을 끌어안지 않는 삶은 없기에, 죽음을 막다보면 결과적으로 삶까지도 막아버린다.’ 죽음과 삶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인식하라고 말합니다.
- ‘사람들이 좋은 소금을 산답시고, 우리 고향 마을의 표현을 빌리자면, ‘죽은 소금’을 고르게 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같은 이치다.’ 좋은 소금= 죽은 소금을 사는 이치라고 하네요. 사과에 죽은 애벌레가 나왔다면 이건 ‘자연산’이구나 생각해야겠네요.
- ‘우리 고향 비금 사람들이 염전에 장판과 타일을 걷어낼 때도 그런 용기가 필요했다.’ 자연이 주는 그대로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삶을 살아가는 방법일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 ‘그러나 「죽음의 춤」 같은 시에서 해방되지는 못했다.’ 정작 저자도 죽음을 직시하는 용기는 필요하다고 말하는 거 같습니다.
- 보들레르의 시를 시작으로 비금도에서 생산된 소금, 소금을 대하는 도시민의 모습, 삶과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확장하며 쓴 에세이입니다.
♣ 필사하기
♣요점정리
* 황현산 작가님의 고향은 전라남도 신안군 작은 섬 비금도.
* 비금도는 인구가 3천이 조금 넘는 낙도.
* 시금치 ‘섬초’와 국내에서 가장 질이 좋은 천일염 ‘비금소금’의 생산지로 유명함.
* 가장 좋은 천일염은 맨 흙에서 얻어내는 ‘토판염’이지만, 소금에 흙빛이 남아 있어 시장에서 팔리지 않았다.
- 도시 사람들은 자연을 그리워한다.
- 도시민들은 늘 ‘자연산’을 구하지만 벌레 먹은 소채에 손을 내밀치 않는다.
- 자연에는 삶과 함께 죽음이 깃들어 있다.
- 도시민들은 그 죽음을 견디지 못한다.
- 죽음을 끌어안지 않는 삶은 없기에, 죽음을 막다보면 결과적으로 삶까지도 막아버린다.
- 사람들이 좋은 소금을 산답시고, 우리 고향 마을의 표현을 빌리자면, ‘죽은 소금’을 고르게 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같은 이치다.’
- 살아 있는 삶은 죽음이 함께 깃들어 있는 삶을 고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 우리 고향 비금 사람들이 염전에 장판과 타일를 걷어낼 때도 그런 용기가 필요했다
- 보들레르의 「죽음의 춤」 같은 시에서 해방되지는 못했다.
◈ 단상 - '벌레 먹은 채소'
“도시민들은 늘 ‘자연산’을 구하지만 벌레 먹은 소채에 손을 내밀지는 않는다.”는 작가님의 글처럼, 나도 본래 산골에서 태어나서, 어릴 적에는 깻잎, 고추, 배추, 대추벌레 등을, 벌레 먹은 자리를 뜯어내고 먹고 했었는데, 언제부턴가 벌레 먹은 것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러면서 자연산을 찾고 있다.
죽음의 춤 - 보들레르
큼직한 꽃다발, 손수건, 그리고 장갑을 가지고
산 사람인양, 귀태 나는 몸맵시를 뽐내는 그녀에겐
괴상한 자태 지닌 야윈 교사스런 여성의
여유 있고 명랑한 품위가 있다.
이보다 더 날씬한 모습을 무도회에서 본 적이 있는가?
품위 있게 풍성하나, 너무 헐렁한 그 옷은
꽃처럼 어여쁜, 술 달린 신이 감싸 주는
앙상한 발 위에 헐렁하게 흘러내린다.
바윗돌에 제 몸 부비는 음탕한 시냇물처럼
쇄골 기슭에서 나풀대는 주름끈은
그녀가 감추려 드는 처량한 젖가슴을
조롱과 비웃음에서 순결하게 지켜 준다.
깊숙한 두 눈, 공허와 어둠으로 만들어지고
멋 부려 꽃을 올려놓은 그녀의 머리는
잔약한 등뼈 위에서 하늘하늘 춤춘다.
오, 얼빠진 듯 치장한 허무의 매력이여!
육체에 도취한 연인들, 표현 못할 인간의
뼈대가 가진 운치를 알지 못하는 그들은
너를 부를 테지, 하나의 삽화라고
키 큰 해골이여, 넌 내 가장 귀한 취미에 잘 들어맞는구나.
너는 그 충격적인 찌푸린 모습을 하고 '삶'의 축제를
휘저으러 오느냐? 아니면 어느 오랜 욕망이
산 해골바가지 너를 또다시 충동하여
방정맞은 널, '쾌락'의 절정에 밀어 넣던가?
바이올린 노래에, 촛불의 불꽃에
빈정대는 네 악몽 쫓아내고 싶었던가.
또한 네 심장에 타오르는 지옥의 불길을
주신제의 술도랑에 와서 식혀 달라는 것인가?
어리석음과 잘못이 마르지 않는 샘이여!
해묵은 고뇌의 영원한 증류기여!
네 갈비뼈의 구부정한 격자 너머로
나는 본다, 아직도 기어 다니는 목마른 독사.
내 진정 말하노니, 너의 교태로
그 애쓴 보람 없을까 두려워라.
이 인간들 중 그 누가 이 빈정거림 알아들을까?
공포의 매력에 도취하는 건 오직 강자들 뿐!
끔찍스런 생각 가득한 네 심오한 두 눈은
현기증을 자아내고, 조심스럽게 춤추는 사내는
쓰디쓴 구역질하지 않고는, 네 서른 두 이빨의
영원한 미소를 바라보지 못하리라.
하지만 누구인들 제 속에 해골을 품지 않았고
그 누가 무덤의 것으로 양육되지 않았는가?
향수도, 옷도, 화장도 무슨 소용 있는가?
아름다운 것도 언젠가는 추한 것이 되고 말리니.
코가 없는 무기(舞妓)여, 억제 못할 위안부여.
그러니 눈 가리고 춤추는 저들에게 말하라.
오만한 도련님들, 아무리 분과 연지로 치장을 했어도
그대들 모두가 '죽음'의 냄새 풍겨요! 오, 사향 바른 해골들이여.
시들은 안티노우스, 수염 없는 댄디
니스 칠한 송장, 백발의 색골들이여,
세상에 널리 알려진 주검의 춤이
알 수 없는 곳으로 그대들을 끌고 가는구나!
차가운 세느 강 둑에서 이글거리는 갠지스 강가에까지
인간 무리들이 넋을 잃고 뛰논다.
천장의 구멍에는 '천사'의 나팔이 시커먼 나팔 총처럼
불길하게 입을 쩍 벌리고 있음을 보지 못한 채
어느 고장, 어느 태양 아래서도, 가소로운 '인생'들이여,
'죽음'은 그대들의 비비적대는 몸짓을 즐거웁게 바라보고
그리고 종종, 그대들처럼 몸에 몰약 냄새 피우며
그대들의 광란에 제 빈정거림 뒤섞는다.
* 안티노우스 - 로마의 황제 아드리안의 몸종으로 총애를 받은 아름다운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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