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 나무의 일 - 오은
나무가 책상이 되는 일
잘리고 구멍이 뚫리고 못이 박히고
낯선 부위와 마주하는 일
모서리를 갖는 일
나무가 침대가 되는 일
나를 지우면서 너를 드러내는 일
나를 비우면서 너를 채우는 일
부피를 갖는 일
나무가 합판이 되는 일
나무가 종이가 되는 일
점점 얇아지는 일
나무가 연필이 되는 일
더 날카로워지는 일
종이가 된 나무가
연필이 된 나무와 만나는 일
밤새 사각거리는 일
종이가 된 나무와
연필이 된 나무가
책상이 된 나무와 만나는 일
한 몸이었던 시절을 떠올리며
다음 날이 되는 일
나무가 문이 되는 일
그림자가 드나들 수 있게
기꺼이 열리는 일
내일을 보고 싶지 않아
굳게 닫히는 일
빗소리를 그리워하는 일
나무가 계단이 되는 일
흙에 덮이는 일
비에 젖는 일
사이를 만들어
발판이 되는 일
나무가 우산이 되는 일
펼 때부터 접힐 때까지
흔들리는 일
- <문장 웹진> 2017년 3월호 / 시집<왼손은 마음이 아파>(현대 문학, 2018)
◈ “자신(나)을 지우면서 인간(너)을 드러내는 나무, 나(나무)를 비우면서 너(인간)을 채우던 희생적인 나무의 생이 담백하게 떠오른다.” - 하린 시인
◈ 나무가 자라서 ‘우산’처럼 펼쳐진 후 죽을 때까지 (접힐 때까지) 저 혼자 몰래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감각 할 수 있을 것이다. - 하린 시인
◈ 희생하는 나무를 생각하는 하루가 되자! - 하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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