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이야기/익어가는 하루(필사)

나무의 일 - 오은

물빛향기 2020. 10. 4. 22:03

199)  나무의 일          - 오은

 

나무가 책상이 되는 일

잘리고 구멍이 뚫리고 못이 박히고

낯선 부위와 마주하는 일

모서리를 갖는 일

 

나무가 침대가 되는 일

나를 지우면서 너를 드러내는 일

나를 비우면서 너를 채우는 일

부피를 갖는 일

 

나무가 합판이 되는 일

나무가 종이가 되는 일

점점 얇아지는 일

 

나무가 연필이 되는 일

더 날카로워지는 일

 

종이가 된 나무가

연필이 된 나무와 만나는 일

밤새 사각거리는 일

 

종이가 된 나무와

연필이 된 나무가

책상이 된 나무와 만나는 일

한 몸이었던 시절을 떠올리며

다음 날이 되는 일

 

나무가 문이 되는 일

그림자가 드나들 수 있게

기꺼이 열리는 일

내일을 보고 싶지 않아

굳게 닫히는 일

빗소리를 그리워하는 일

 

나무가 계단이 되는 일

흙에 덮이는 일

비에 젖는 일

사이를 만들어

발판이 되는 일

 

나무가 우산이 되는 일

펼 때부터 접힐 때까지

흔들리는 일

 

   - <문장 웹진> 20173월호 / 시집<왼손은 마음이 아파>(현대 문학, 2018)

 

 

 

자신()을 지우면서 인간()을 드러내는 나무, (나무)를 비우면서 너(인간)을 채우던 희생적인 나무의 생이 담백하게 떠오른다.” - 하린 시인

 

나무가 자라서 우산처럼 펼쳐진 후 죽을 때까지 (접힐 때까지) 저 혼자 몰래 흔들리고있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감각 할 수 있을 것이다. - 하린 시인

 

희생하는 나무를 생각하는 하루가 되자! - 하린 시인

 

'독서이야기 > 익어가는 하루(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취불귀 不醉不歸 - 허수경  (0) 2020.10.09
걱정하지 마 걱정하지 마 - 최승자  (0) 2020.10.05
모래 여자 - 김혜순  (0) 2020.10.03
첫사랑 - 이정록  (0) 2020.10.02
가족 - 진은영  (0) 2020.0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