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 모래 여자 - 김혜순
모래 속에서 여자를 들어올렸다
여자는 머리털 하나 상한 데가 없이 깨끗했다
여자는 그가 떠난 후 자지도 먹지도 않았다고 전해졌다
여자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숨을 쉬지도 않았지만 죽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와서 여자를 데려갔다
옷을 벗기고 소금물에 담그고 가랑이를 벌리고
머리털을 자르고 가슴을 열었다고 했다
여자의 그가 전장에서 죽고
나라마저 멀리멀리 떠나버렸다고 했건만
여자는 목숨을 삼킨 채
세상에다 제 숨을 풀어놓진 않았다
몸속으로 칼날이 들락거려도 감은 눈 뜨지 않았다
사람들은 여자를 다시 꿰매 유리관 속에 뉘었다
기다리는 그는 오지 않고 사방에서 손가락들이 몰려왔다
모래 속에 숨은 여자를 끌어올려
종이 위에 부려놓은 두 손을 날마다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낙타를 타고 이곳을 떠나 멀리 도망가고 싶었다
꿈마다 여자가 따라와서
검은 눈 번쩍 떴다
여자의 눈꺼풀 속이 사막의 밤하늘보다 깊고 넓었다
- 2006년 제6회 미당 문학상 수상시
미당문학상 심사평 - 미라 같은 ‘여성의 삶’ 깊고 조용하게 응시
최종심에 오른 250여 편의 시 가운데서 오직 한 편을 뽑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일정 수준 이상의 작품이라면 점과 취향에 따른 다양한 평가가 있을 수 있고, 그런 만큼 일렬로 순위를 매길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심사위원들은 그런 가운데서도 250여 편의 시 속을 조심스레 헤집고 들어가 오랜 시간 의견을 조율하였다.
우선 전체적인 느낌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발표작품이 너무 많아서인지 몰라도 긴장이 풀어진 작품이 비교적 많았다는 점, 그리고 너무 사적인 세계에 빠져 있는 경향이 지적되었다. 그래서 우선 시적 긴장과 공공성이라는 관점에서 좀더 신뢰감을 준 몇 분의 시인으로 좁혔고, 그들의 작품 가운데서 10여 편이 최종 후보작으로 선별되었다.
이후 논의는 작품의 어떤 사소한 부분에서부터 시인의 전체적 성향에 이르기까지 자유롭게 전개되었고, 한 작품에 대한 부정적인 지적과 그에 대한 동의가 있으면 해당 작품은 제외되었다. 가령 어떤 작품은 강력한 추천을 받았으나, 최근 우리 시단에 유행이 되고 있는 '선(禪)적인 모호성'이 지적되어 제외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김혜순의 '모래 여자'가 수상작으로 결정되었다. 시력 20여 년의 김혜순은 우리 시단에서 가장 개성적인 시 세계를 구축한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개성이 워낙 강하다 보니 그의 시에 대해 호감을 갖지 않은 이도 있지만, 그런 이들조차 김혜순의 시가 고수의 경지인 것은 인정하는 편이다.
'모래 여자'는 차분하게 정제된 언어를 보여주는 시다. 미라의 발굴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마치 미라의 발굴처럼 아주 조심스럽게 모래 여자의 존재를 조금씩 펼쳐 보여준다. 독자들은 숨을 죽이고 모래 여자가 어떻게 존재했고 어떤 취급을 받았으며 이제 어떤 모습으로 남았는지를 비밀의 베일을 펼치듯 알게 된다. 그리하여 그 모든 모습이 드러났을 때, 독자들은 그 모래 여자가 결국은 갖은 소외와 수모의 삶을 조용히 견뎌온 한 여성의 삶의 환유임을 알게 된다.
'모래 여자'는 어떤 면에서는 김혜순적이고, 다른 면에서는 김혜순적이 아니다. 김혜순의 깊고 조용한 응시가 어디까지 뻗어 있는가를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고, 우리 시대 여성성의 한 기호가 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심사위원들은,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은 다채로움보다는 조용함이라는 생각에서 '모래 여자' 쪽을 조용히 선택했다.
◆심사위원=정현종.김주연.황현산.최승호.이남호(대표집필 이남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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