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이야기/익어가는 하루(필사)

빈집의 약속 - 문태준

물빛향기 2020. 1. 17. 21:41

빈집의 약속                  ㅡ 문태준
 
마음은 빈집 같아서 어떤 때는 독사가 살고

어떤 때는 청보리밭 너른 들이 살았다
별이 보고 싶은 날에는 개심사 심검당 볕 내리는

고운 마루가 들어와 살기도 하였다
어느 날에는 늦눈보라가 몰아쳐 마음이 서럽기도 하였다
겨울방이 방 한켠에 묵은 메주를 매달아 두듯

마음에 봄가을 없이 풍경들이 들어와 살았다


그러나 하릴없이 전나무 숲이 들어와 머무르는 때가

나에게는 행복하였다
수십 년 혹은 백 년 전부터 살아온 나무들,

천둥처럼 하늘로 솟아오는 나무들
뭉긋이 앉은 그 나무들의 울울창창한 고요를 나는

미륵들의 미소라 불렀다


한 걸음의 말도 내놓지 않고 오롯하게 큰 침묵인

그 미륵들이 잔혹한 말들의 세월을 견디게 하였다
그러나 전나무 숲이 들어앉았다 나가면 그뿐,

마음은 늘 빈집이어서
마음 안의 그 둥그런 고요가 다른 것으로 메워졌다
대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듯 마음이란 그냥 풍경을

들어앉히는 착한 사진사 같은 것
그것이 빈집의 약속 같은 것이었다

-시집『가재미』(문학과지성사, 2006)
-시선집『제20회 소월시문학상 작품집』(문학사상 2006)


===  "겨울방이 방 한켠에 묵은 메주를 매달아 두듯"

시인의 말처럼, 어릴적 시골에서는

겨울마다 메주를 방 한 켠에 놓기도 하고 메달아 놓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보기 힘드네요. 

메주냄새가 참 거시기 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