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이야기/익어가는 하루(필사)

거미의 생에 가 보았는가 - 고형렬

물빛향기 2020. 1. 20. 11:39

거미의 생에 가 보았는가                  - 고형렬

 

천신만고 끝에 우리 네 식구는 문지방을 넘었다

아버지를 잃은 우리는 어떤 방에 들어갔다

아뜩했다 흐린 백열등 하나 천장 가운데 달랑 걸려 있어

 

밖에서 들어오는 바람에 간혹 줄이 흔들렸다

 

우리는 등을 쳐다보면서 삿자리를 건너가고 있었다

건너편에 뜯어진 벽지의 황토가 보였다 우리는 그리로

건너가고 윙 추억 같은 풍음이 들려왔다

귓속의 머리카락 같은 대롱에서 바람이 슬픈 소리를 냈다

 

모든 것은 이렇게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인간들에게 어떤 시절이 지나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방에 늙은 학생같이 생긴 한 남자가

검은 책을 보고 있었다 우리는 그 남자의 바로

책 표지 밑을 지나가고 있었다

 

머리를 뒤로 넘긴 것 같은 조금 수척한 남자가 멈칫했다

앞에 가던 형아가 보였던 모양이다 남자는

형아를 쓸어서 밖으로 버리고 다시 책을 보기 시작했다

모친은 그 앞을 가로질러 나아갔다 아들이

사라진 지점에서 어미는 두리번거리고 서 있었다

 

그때 남자가 모친을 쓸어 받아 문을 열고 한데로 버렸다

먼지처럼 날아갔다 남자는

뒤따라가는 아우에게 얇은 종이를 갖다 대는 참이었다

마치 입에 물라는 듯이

아우는 종이 위로 올라섰다 순간 남자는

문을 열고 아우를 밖으로 내다 버렸다

 

나는 뒤에서 앙 하고 소리치며 울었다 그 울음이

들릴 리가 만무했지만

그때 남자가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빠진 것 같았다

 

혈육들은 그 후 어떻게 됐는지 알 길이 없다

바람 소리만 그날 밤새도록 어디론가 불어 갔다 어둠 속

삿자리 밑에서 나는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알 수 없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슬프다는 생각조차 없었다

 

이것이 우리 가족의 긴 미래사였다

남자는 단지 거미를 죽이지 않고 내다 버렸지만

그날 밤 나는 찢어진 벽지 속 황토 흙 속으로 들어갔다 

 

- 고형렬 시집<나는 지금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창비, 2010)


     ===> 백석 시인의 <수라>를 배경으로 만든 작품.



=== 백석 시인의 <수라>를 배경으로 만든 작품.

거미를 의인화하여 시상을 전개한,

둘째 거미가 본 거미 가족들이 한 사람의 의해서 이별하는

거미의 시선에서 거미의 가족의 이동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거미 가족의 미래사였음을 보여준다.

나도 무심코 거미, 개미, 바퀴벌레, 파리 등을

무수히 인정사정 없이 잡기도 하고, 밖으로 버리기도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