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 - 류근
그대 떠난 길 지워지라고
눈이 내린다
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져버리라고
온밤 내 욕설처럼 눈이 내린다
온 길도 간 길도 없이
깊은 눈발 속으로 지워진 사람
떠돌다 온 발자국마다 하얗게 피가 맺혀서
이제는 기억조차 먼 빛으로 발이 묶인다
내게로 오는 모든 길이 문을 닫는다
귀를 막으면 종소리 같은
결별의 예감 한 잎
살아서 바라보지 못한 푸른 눈시울
살아서 지은 무덤 위에
내 이름 위에
아니 아니, 아프게 눈이 내린다
참았던 뉘우침처럼 눈이 내린다
그대 떠난 길 지워지라고
눈이 내린다
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져버리라고
사나흘 눈 감고 젖은 눈이 내린다
- 시집 『상처적 체질』(문학과지성사. 2010)
=== 오늘 시는 나의 과거를 회상케 하는 아름다운 시(詩)입니다.
이젠 사라진 발자국보다, 지금 나의 곁에 있는 인생의 동반자와 함께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추억도 아름답게 간직하고, 현재는 더 아름답게 만들어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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