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이야기/에세이필사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 임홍빈) - 4

물빛향기 2020. 3. 7. 22:01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 임홍빈) - 4


제3장 ‘한 여름의 아테네에서 최초로 42킬로를 달리다’
2005년 9월 1일 하와이 주 카우아이 섬


골!
드디어 결승점에 다다랐다. 성취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다. 내 머릿속에서는 ‘이제 더 이상 달리지 않아도 좋다’라는 안도감뿐이다. 주유소의 수도를 빌려서 온몸의 열기를 가라앉히고 몸에 달라붙은 소금을 씻어낸다. 인간 염전이랄까. 온몸이 소금투성이다. 사정을 들은 주유소의 아저씨가 화분의 꽃을 꺾어서 작은 꽃다발을 만들어 나에게 건네준다. “수고했어요. 축하합니다!” 이국 사람들의 그런 작은 마음 씀씀이에 가슴이 뭉클하다. 마라톤은 작고 친절한 마을이다.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마을이다. 이런 곳에서 수천 년 전에 그리스 군이 처절한 전쟁 끝에 페르시아의 원정군을 배수진치고 물리쳤다니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다. 마라톤 마을의 아침 카페에서 나는 마음이 내키는 대로 찬 암스텔 비어를 마신다. 맥주는 물론 맛있다. 그러나 현실의 맥주는 달리면서 절실하게 상상했던 맥주만큼 맛있지는 않다. 제정신을 잃은 인간이 품은 환상만큼 아름다운 것은 현실 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테네에서 마라톤까지의 소요 시간은 3시간 51분. 좋은 기록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아무튼 나는 혼자서 마라톤 코스를 주파한 것이다. 교통지옥과 상상을 초월하는 더위와 격렬한 갈증을 극복하고, 이만하면 나 스스로도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좋을듯하다. 그러나 그런 일은 지금 이 순간 아무래도 좋다. 아무튼 더 이상 한 발짝도 달릴 필요가 없다— 뭐라고 해도 그것이 가장 기쁘다.
아아, 이제 더 이상 달리지 않아도 괜찮다.(p.103)



■ 문장 분석

-작가 하루키가 그리스 아테네에서 첫 풀코스에 도전한 에세이 부분입니다.
-‘성취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다.’ 첫 마라톤에 완주했는데도 감정을 과하게 전달하지 않습니다. 최대한 절제해서 쓴 부분이 돋보입니다.
-‘몸에 달라붙은 소금을 씻어낸다. 인간 염전이랄까. 온몸이 소금투성이다.’ 소금-염전-소금투성이라는 단어들로 당시 몸의 상태(땀)와 태양의 뜨거움이 전해집니다.
-‘사정을 들은 주유소의 아저씨가’ 마라톤 과정을 아저씨에게 설명했을 텐데 ‘사정을 들은’ 표현으로 일축해버립니다. 주절이 서술하지 않습니다.
- ‘화분의 꽃을 꺾어서 작은 꽃다발을 만들어 나에게 건네준다.’는 표현에서는 감동이 옵니다. 이 문장에서 ‘화분의’을 빼고 ‘꽃을 꺾어서’였다면 감동이 덜해지겠네요. 단어가 주는 영향력을 생각하게 만드는 표현입니다.
-‘마라톤은 작고 친절한 마을이다.’로 간결하게 마을을 묘사했습니다.(‘마라톤’은 그리스 아테네에 있는 지명)
-암스텔 비어 [Amstel Beer] 네델란드 맥주
-‘현실의 맥주는 달리면서 절실하게 상상했던 맥주만큼 맛있지는 않다. 제정신을 잃은 인간이 품은 환상만큼 아름다운 것은 현실 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의 맥주와 달리면서 상상했던 맥주의 차이를 비교했습니다.
-‘교통지옥과 상상을 초월하는 더위와 격렬한 갈증을 극복하고, 이만하면 나 스스로도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좋을듯하다.’ (교통)지옥/ 상상을 초월하는(더위)/ 격렬한(갈증)/ 등의 표현이 당시의 상황을 대변해줍니다.
- 3시간 51분이란 기록은 좋지 않지만 이런 상황을 극복했으니 ‘이만하면 나 스스로도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좋을듯하다.’며 자신을 격려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