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이야기/에세이필사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 임홍빈) - 7

물빛향기 2020. 3. 9. 19:01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 임홍빈) - 7


제6장 ‘이제 아무도 테이블을 두드리지 않고 아무도 컵을 던지지 않았다’
1996년 6월 23일 홋카이도 사로마 호수에서


무리를 해서 계속 달리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 걷는 쪽이 현명했을지도 모른다. 많은 주자들은 그렇게 하고 있었다. 걸으면서 다리를 쉬게 한다. 그렇지만 나는 한 번도 걷지 않았다. 스트레칭을 하기 위한 휴식은 착실하게 취했다. 그러나 걷지는 않았다. 나는 걷기 위해서 이 레이스에 참가한 것이 아니다. 달리기 위해 참가한 것이다. 그 때문에-그 목적 하나를 위해-비행기를 타고 일부러 일본의 북녘 끝까지 날아온 것이다. 아무리 달리는 스피드가 떨어졌다 해도 걸을 수는 없다. 그것이 규칙이다. 만약 자신이 정한 규칙을 한 번이라도 깨트린다면 앞으로도 다시 규칙을 깨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 레이스를 완주하는 것은 아마도 어렵게 될 것이다.(p.172)

아니, 실제로는 그다지 대단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그저 달린다는 행위에 대해 얼마간 싫증을 느끼고 있는 것뿐인지도 모른다. 오랜 세월에 걸쳐서 너무도 많은 거리를 지나치게 많이 달려왔던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40대 후반에 접어들어 체력적인 능력 면에서 나이라는 피할 수 없는 벽에 직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육체적인 피크를 지났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실감했는지도 모른다. 또는 종합적인 남성 갱년기 같은 시기를 맞이하여, 그것이 가져온 정신적인 나락(奈落)을(잘 알지 못하는 사이에)기어 나왔는지도 모른다. 혹은 그런 여러 가지 요소가 합쳐져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부정적인 칵테일과 같은 것이 만들어진 것일까. 당사자인 나로서는 그런 상념들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판별할 수가 없다. 어쨌든 나는 그것을 ‘러너스 블루’라고 이름 붙였다.(p.183)



■ 문장 분석

-울트라 마라톤을 한 이후 작가에게 찾아온 ‘러너스 블루’에 대한 에세이입니다.
-러너스 블루는 ‘주자의 우울’(p.29)로 일종의 우울감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울트라 마라톤은 100킬로를 달리는 마라톤 대회입니다.
-하루키는 울트라 마라톤에서 11시간 42분 동안 달립니다.
-‘그렇지만 나는 한 번도 걷지 않았다.’, ‘나는 걷기 위해서 이 레이스에 참가한 것이 아니다. 달리기 위해 참가한 것이다.’, ‘아무리 달리는 스피드가 떨어졌다 해도 걸을 수는 없다.’ 등을 보면 자신은 달렸지 걷지는 않았다고 여러 번 강조합니다. 걷지 않기로 한 자신과의 싸움이 엿보입니다.
-‘만약 자신이 정한 규칙을 한 번이라도 깨트린다면 앞으로도 다시 규칙을 깨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 레이스를 완주하는 것은 아마도 어렵게 될 것이다.’ 걷기 시작하면 달린다는 규칙이 깨지며 완주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전달합니다.
-달린다는 것에 관한 목적과 규칙, 그 규칙을 실천하는 자신만의 철학이 담긴 부분입니다.
-‘러너스 블루’는 마라톤이 시들해지고 예전처럼 열의를 가질 수 없게 되고 의욕도 떨어진 상태를 하루키가 ‘블루’라고 이름을 붙였네요.
-‘나는 그저 달린다는 행위에 대해 얼마간 싫증을 느끼고 있는 것뿐인지도 모른다.’ 싫증이란 단어에 주목하게 됩니다.
-지나치게 많이/40대 후반 접어들어/ 나이를 피할 수 없는 벽/ 육체적인 피크를 지났다는 것/종합적인 남성 갱년기 같은 시기를 맞이하여/그것이 가져온 정신적인 나락(奈落)을/정체를 알 수 없는 부정적인 칵테일과 같은 것/ 작가는 이런 표현들을 써서 울트라 마라톤 이후 마라톤에 대한 열의가 식어버린 자신의 우울감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나락(奈落): 벗어나기 어려운 절망적인 상황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어쨌든 나는 그것을 ‘러너스 블루’라고 이름 붙였다.’ 일종의 마라톤 후유증 증상을 겪고 있는 상황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