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이야기/에세이필사

라면을 끓이며 (김훈, 문학동네) - 8

물빛향기 2020. 3. 23. 14:30

라면을 끓이며 (김훈, 문학동네) - 8


바다의 기별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른다.(p.223)


‘사랑’의 메모장을 열어보니 ‘너’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언제 적은 글자인지는 기억이 없다. ‘너’아랫줄에 너는 이인칭인가 삼인칭인가, 라는 낙서도 적혀 있다. ‘정맥’이라는 글자도 적혀 있다. ‘너’와 ‘정맥’을 합쳐서 ‘너의 정맥’이라고 쓸 때, 온몸의 힘이 빠져서 기진맥진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름’이라는 글자 밑에는 이름과 부름 사이의 거리는 얼마인가라고도 적혀 있다. 치타, 백곰, 얼룩말, 부엉이같이 말을 걸 수 없는 동물의 이름도 들어 있다. 이 안쓰러운 단어 몇 개를 징검다리로 늘어놓고 닿을 수 없는 저편으로 건너가려 했던 모양인데, 나는 무참해서 메모장을 덮는다.

물가에서 돌아온 밤에 램프 밑에 앉아 당신의 정맥에 관하여 적는다. 그해 여름에 비가 많이 내렸고 빗속에서 나무와 짐승들이 비린내를 풍겼다. 비에 젖어서, 산 것들의 몸냄새가 몸 밖으로 번져나오던 그 여름에 당신의 소매 없는 블라우스 아래로 당신의 흰 팔이 드러났고 푸른 정맥 한 줄기가 살갗 위를 흐르고 있었다. 당신의 정맥에서 새벽안개의 냄새가 날 듯했고 정맥의 푸른색은 낯선 시간의 빛깔이었다.(p.225)



■ 문장 분석

-사랑에 관한 에세이입니다.
-메모장에서 본 단어들로 지나간 사랑의 기억을 소환하고 있습니다.
-‘이 안쓰러운 단어 몇 개를 징검다리로 늘어놓고 닿을 수 없는 저편으로 건너가려 했던 모양인데,’
안쓰러운 단어 몇 개는 너(너는 이인칭인가 삼인칭인가)/ 너의 정맥/ 이름(이름과 부름 사이의 거리는 얼마인가라고도 적혀 있다./ 치타, 백곰, 얼룩말, 부엉이같이 말을 걸 수 없는 동물의 이름 등입니다.
-‘나는 무참해서 메모장을 덮는다.’면서 이 단어들에 대한 기억들을 하나씩 서술합니다.
-이런 단어와 ‘사랑’을 생각하니 무참해진다는 표현을 쓰고 있네요.
-“ ‘너의 정맥’이라고 쓸 때, 온몸의 힘이 빠져서 기진맥진했던 기억이 떠올랐다.”며 책에 상세히 적고 있습니다.(블라우스 아래로 흰 팔이 드러났고 푸른 정맥 한 줄기가~~ / 이 부분을 읽으면 왜 온몸의 힘이 빠져서 기진맥진했는지 알게 됨.)
-나는 어떤 단어를 보고 사랑을 떠올릴 수 있는지 생각해보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