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 - 백석 (1912~1996)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 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싸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늬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녚 은댕이 예데가리밭에서
하로밤 뽀오햔 흰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녯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녀름볕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으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텁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든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여늬 하로밤
아배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배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사발에 그득히 사리워 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여났다는 먼 녯적 큰마니가
또 그 집등색이에 서서 자채기를 하면 산 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녯적 큰 아버지가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素朴)한 것은 무엇인가
- <정본 백석 시집>(문학동네, 2007)
* 산엣새 : 산에 있는 새 * 나려 멕이고 : 내려와 주고 받으며 지저귀고
* 김치가재미: 북쪽 지역의 김치를 넣어 두는 팡고, 헛간 - 겨울철 김치를 묻은 다음 얼지 않게 그위에 지푸라기나 수수깡 따위를 만들어놓은 움막.
* 양지귀: 햇살 바른 가장자리 * 능달쪽: 응달쪽
* 은댕이: 가장자리(언저리) * 예데가리밭: 산의 맨 꼭대기에 있는 오래된 비탈밭
* 산멍에: ‘이무기’ 의 평안도 말. 산몽애, 뱀의 한 종류
* 분틀: 국수를 뽑아내는 틀 * 들쿠레하다: 상큼하지 않고 시금털털하다
* 갈바람: 가을바람 또는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 사리워 오다: ‘사리다’ 의 뜻인 듯함. ‘사리다’ 는 국수, 새끼, 실 따위를 동그랗게 포개어 간다는 뜻
* 큰마니: ‘할머니’ 의 평안도 말 * 집등색이: 짚등석. 짚이나 칡덩쿨로 짜서 만든 자리
* 자채기: 재채기 * 탄수 : 식초
* 댕추가루: ‘고추가루’ 의 평안도 말. 당춧가루, 고춧가루
* 삿방: 삿(갈대를 엮어서 만든 자리)을 깐 방 *아르궅: 아랫목
* 고담하다 : 예스럽고 속되지 않으며 담담하다
===
눈이 내려서 온통 하얀 세상이다.
형들과 동생들이 함께 들로 산으로
토끼 몰이와 꿩 사냥을 나간다.
산등성에 올라 토끼가 다닌 자리를 찾고, 꿩이 앉은 자리를 찾아본다.
찾으면, 토끼가 다니는 길목에 덫을 놓고,
꿩은 열매를 조금씩 뿌려 유인하여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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