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이야기/익어가는 하루(필사)

적막한 식욕 - 박목월

물빛향기 2020. 3. 29. 22:48

적막한 식욕         - 박목월

 

모밀묵이 먹고 싶다.

그 싱겁고 구수하고

못나고도 소박하게 점잖은

촌 잔칫날 팔모상에 올라

새사돈을 대접하는 것.

그것은 저문 봄날 해질 무렵에

허전한 마음이

마음을 달래는

쓸쓸한 식욕이 꿈꾸는 음식.

또한 인생의 참뜻을 짐작한 자의

너그럽고 넉넉한

눈물이 갈구하는 쓸쓸한 식성.

아버지와 아들이 겸상을 하고

손과 주인이 겸상(兼床)을 하고

산나물을

곁들여 놓고

어수룩한 산기슭의 허술한 물방아처럼

슬금슬금 세상 얘기를 하며

먹는 음식.

그리고 마디가 굵은 사투리로

은은하게 서로 사랑하며 어여삐 여기며

그렇게 이웃끼리

이 세상을 건느고

저승을 갈 때,

보이소 아는 양반 앙인기요

보이소 웃마을 이생원 앙인기요

서로 불러 길을 가며 쉬며 그 마지막 주막에서

걸걸한 막걸리 잔을 나눌 때

절로 젓가락이 가는

쓸쓸한 음식

 

- 시집 <()기타>(신구문화사.1959) -

 

=== 싱겁고 구수하면서 소박한 면으로서

마음을 달래며 먹을 수 있는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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