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쿠아리움 - 김이듬
오늘처럼 인생이 싫은 날에도 나는 생각한다
실연한 사람에게 권할 책으로 뭐가 있을까
그가 푸른 바다거북이 곁에서 읽을 책을 달라고 했다
오늘처럼 인생이 싫은 날에도 웃고
오늘처럼 돈이 필요한 날에도 나는 참는 동물이기 때문에
대형어류를 키우는 일이 직업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쳐다본다
최근에 그는 사람을 잃었다고 말한다
죽음을 앞둔 상어와 흑가오리에게 먹이를 주다가 읽을 책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사람들은 아무런 할 일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내가 헤엄치는 것을 논다고 말하며 손가락질한다
해저터널로 들어온 아이들도 죽음을 앞둔 어른처럼 돈을 안다
유리벽을 두드리며 나를 깨운다
나는 산호 사이를 헤엄쳐 주다가 모래 비탈면에 누워 사색한다
나는 몸통이 가는 편이고 무리 짓지 않는다
사라진 지느러미가 기억하는 움직임에 따라 쉬기도 한다
누가 가까이와도 해치지 않는다
사람들은 내 곁에서 책을 읽고
오늘처럼 돈이 필요한 날에도 팔지 않는 책이 내게는 있다
궁핍하지만 대담하게 오늘처럼 인생이 싫은 날에도 자라고 있다
- 월간<시인동네> 2018년 4월호
=== 단상) 작은 책방(책방 이듬)을 운영하고 있는 시인의 시다.
시인에게 책방은 아쿠아리움이라고 한다.
시인은 책 사이를 헤엄치며 손님들을 기다린다.
인생이 싫은 날에도 서점에 나와서 자리를 지키며, 창밖에 지나가던 사람들은
유리 안쪽을 보고 신기해하거나 논다고 말하며 손가락질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시인은 헤엄치는 아쿠아리스트처럼 거리를 두고 책꽂이 사이를 헤엄치듯 다닌다고 한다.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는 시(詩)이다.
이곳은 일산에 있는 일산호수 옆, 작은 책방을 아쿠아리움으로
반전시킨 상상력이 재미있고, 시인은 오늘도 아쿠아리움에서
“팔리지 않는 책이 내게는 있다”라고 하면서
“오늘처럼 인생이 싫은 날에도” 우리는 “자라고 있다”라고 한다.
아쿠아리움 속에 있는 시인을 만나보려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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