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이야기/익어가는 하루(필사)

여수 - 서효인

물빛향기 2020. 7. 20. 21:55

여수 - 서효인

 

사랑하는 여자가 있는 도시를

사랑하게 된 날이 있었다

다시는 못 올 것이라 생각하니

비가 오기 시작했고, 비를 머금은 공장에서

푸른 연기가 쉬지 않고

공중으로 흩어졌다

흰 빨래는 내어놓질 못했다

너의 얼굴을 생각 바깥으로

내보낼 수 없었다 그것은

나로 인해서 더러워지고 있었다

 

이 도시를 둘러싼 바다와 바다가 풍기는 살냄새

무서웠다 버스가 축축한 아스팔트를 감고 돌았다

버스의 진동에 따라 눈을 감고

거의 다 깨버린 잠을 붙잡았다

도착 이후에 끝을 말할 것이다

도시의 복판에 이르러 바다가 내보내는 냄새에

눈을 떴다 멀리 공장이 보이고

그 아래에 시커먼 빨래가 있고

끝이라 생각한 곳에서 다시 바다가 나타나고

길이 나타나고 여수였다

 

너의 얼굴이 완성되고 있었다

이 도시를 사랑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네 얼굴을 닮아버린 해안은

세계를 통틀어 여기뿐이므로

 

표정이 울상인 너를 사랑하게 된 날이

있었다 무서운 사랑이

시작되었다

 

- 시집<여수>(문학과 지성사, 2017)

 

 

===

 

30세 초반에 무작정 가방 하나 둘러메고

여수 오동도와 향일암을 다녀온 기억이 난다.

지금도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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