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봄방 - 권혁웅
전봇대에 윗옷 걸어두고 발치에 양말 벗어두고
천변 벤치에 누워 코를 고는 취객
현세와 통하는 스위치를 화끈하게 내려버린
저 캄캄함 혹은 편안한
그는 자신을 마셔버린 거다
무슨 맛이었을까?
아니 그는 자신을 저기에 토해놓은 거다
이번엔 무슨 맛이었을까?
먹고 마시고 토하는 동안 그는 그냥 긴 관(管)이다.
그가 전 생애를 걸고
이쪽저쪽으로 몰려다니는 동안
침대와 옷걸이를 들고 집이 그를 마중 나왔다
지갑은 누군가 가져간지 오래,
현세로 돌아갈 패스포트를 잃어버렸으므로
그는 편안한 수평이 되어 있다
다시 직립인간이 되지는 않겠다는 듯이
부장 앞에서 목이 굽은 인간으로
다시 진화하지 않겠다는 듯이
봄밤이 거느린 슬하,
어리둥절한 꽃잎 하나가 그를 덮는다
이불처럼
부의 봉투처럼
(미당문학상 수상작 중앙일보, 2012)
=== 20대 후반에 만취되어 집을 찾는다는 것이 정신이 끊겨,
거리 벤치에 누워 코를 고는 나를 발견,
벤치의 편안함에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네.
둥근 보름달 밑에서,
꽃잎 하나를 이불처럼 덮고 자는
나를 발견한다.
가끔은 나를 놓아버리는 것이 나를 다시 찾는 경험이 되기도 하고,
너무 술에 의지 하지만 않는다면 이런 추억 하나 쯤은 있어도 괜찮을 것 같다.
둥근 보름달 밑에서, 꽃잎 하나를 이불처럼 덮고
자는 그런 삶을
'독서이야기 > 익어가는 하루(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추 한알 - 장석주 (0) | 2019.11.23 |
---|---|
흙 - 문정희 (0) | 2019.11.21 |
너무 아픈 사랑 - 류근 (0) | 2019.11.18 |
날아라 버스야! - 정현종 (0) | 2019.11.17 |
외계 - 김경주 (0) | 2019.1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