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력서 - 오은
밥을 먹고 쓰는 것.
밥을 먹기 위해 쓰는 것.
한 줄씩 쓸 때마다 한숨 나는 것.
나는 잘났고
나는 둥글둥글하고
나는 예의 바르다는 사실을
최대한 은밀하게 말해야 한다.
오늘밤에는, 그리고
오늘밤에도
내 자랑을 겸손하게 해야 한다.
혼자 추는 왈츠처럼, 시끄러운 팬터마임처럼
달콤한 혀로 속삭이듯
포장술을 스스로 익히는 시간.
다음 버전이 언제 업데이트 될지는 나도 잘 모른다.
다 쓰고 나면 어김없이 허기.
아무리 먹어도 허깨비처럼 가벼워지는데
몇 줄의 거짓말처럼
내일 아침 문서가 열린다.
문서상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다.
- 시집<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문학동네, 2013)
=== 이력 : 지금까지 거쳐온 학업, 직업, 경험 등의 발자취.
"밥을 먹기 위해" 시인의 말처럼 이력서를 써 본지가 꽤 오래된 것 같다.
밥을 먹기 위해 한 줄씩 쓸때마다
하루 양식이 절실하다.
둥글둥글하게 겸손하게
달콤하고 은밀하게 써 내려간다.
그럴싸하게 꾸면서
새로운 길을 밟고 지나가는
얇은 종이에 추리고 추린 한 장의 이력서
무거운 마음으로
오늘도 몇 줄의 이력을 더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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