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이야기/익어가는 하루(필사)

남해 금산 - 이성복

물빛향기 2020. 5. 12. 22:19

남해 금산     - 이성복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서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 시집<남해금산>(문학과 지성사, 1986)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 정끝별 해설 - 믿음사

 

   돌 속에 묻힌 한 여자의 사랑을 따라 한 남자가 돌 속에 들어간다면, 그들은 돌의 연인이고 돌의 사랑에 빠졌음에 틀림없다. 그 돌 속에는 불이 있고 목마름이 있고 소금이 있고 무심(無心)이 있고 산 같은 숙명이 있었을 터. 팔다리가 하나로 엉킨 그 돌의 형상을 '사랑의 끔찍한 포옹'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런데 왜 한 여자는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났을까. 어쩌자고 해와 달은 그 여자를 끌어 주었을까.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한 남자를 남긴 채. 돌 속에 홀로 남은 그 남자는 푸른 바닷물 속에 잠기면서 부풀어 간다. 물의 깊이로 헤아릴 길 없는 사랑의 부재를 채우며, 그러니 그 돌은 불타는 상상을 불러일으킬밖에. 그러니 그 돌은 매혹일 수밖에. 남해 금산에서 돌의 사랑은 영원하다. 시간은 대과거에서 과거로 다시 현재로 넘나들고, 공간은 물과 돌의 안팎을 자유롭게 드나든다. 과거도 아니고 현재도 아닌, (시작)도 없고 밖()도 없는 그곳에서 시인은 도달 할 수 없는 사랑의 심연으로 잠기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돌이 되고 바위가 되는지 남해의 금산에 가 보면 안다. 남해 금산의 하늘가 상사암에 가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랑들이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 채 돌이 되었는지 알 수 있다. 서로를 마주한 채 요지부동의 뿌리를 박고 있는지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을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모든 사랑은 위험하지만 사랑이 없는 삶은 더욱 치명적이라는 것을, 어긋난 사랑의 피난처이자 보루가 문득 돌이 되어 가라앉기만 한다는 것을, 어쩌면 한 번을 있을 법한 사랑의 깊은 슬픔이 저토록 아름답기도 하다는 것을 나는 <남해 금산>에서 배웠다. 모든 문을 다 걸어 잠근, 남해 금산 돌의 풍경 속 1980년대 사랑법이었다.

 

   1980년대 시단에 파란을 일으킨 이성복 시인의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1980)는 기존의 시 문법을 파괴하는 낯선 비유와 의식의 초현실적 해체를 통해 시대적 상처를 새롭게 조명했다. <남해 금산>은 그러한 실험적 언어가 다 정제된 서정의 언어로 변화하는 기점에 놓인 시다.

===  "사랑의 끔찍한 포웅"  - 왜, 한 여자는 울면서 돌에서 떠났을까?

 

남해 바닷가

소라에서

들리는 소리

사랑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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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시       - 이성복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었습니다

늦고 헐한 저녁이 옵니다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사방에서 새 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

어두워 가며 몸 뒤트는 풀밭,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키 큰 미루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

 

   - 일간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50/1(조선일보 연재, 2008)

   - 신현림 엮음딸아,외로울 때는 시를 읽으렴(걷는나무,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