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이야기/익어가는 하루(필사)

농약상회에서 - 함민복

물빛향기 2020. 5. 20. 18:56

농약 상회에서                          - 함민복

 

치마 아욱

마니따 고추

장한 열무

제초대첩 제초제

부메랑 살충제

아리랑 쥐약

먹을 것 생산해줄 씨앗들과

먹을 것 먹어치우는 것들 죽일 약들

극명하게 갈라놓았다

향기롭던 음식도 먹을 수 없게 되면

역한 냄새로 판별하는 내 감각

반성해보다

슈퍼 옥수수

슈퍼 콩

슈퍼 소

꼭 그리해야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다면

차라리

사람들이 작아지는 방법을 연구해보면 어떨까

앙증맞을 집, 인공의 날개, 꼬막 밥그릇

나뭇가지 위에서의 잠, 하늘에서의 사랑

무엇보다도 풀, 새, 물고기들에게도 겸손해질 수 있겠지

계산대 앞에서

푸른빛 쏟아질 듯

흔들리는 아욱 씨앗 소리

 

    - 시집<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창비, 2013)

===  "먹을 것 생산해줄 씨앗들과 먹을 것 먹어치우는 것들

죽일 약들 극명하게 갈라놓았다."

 

사람들이 작아진다면 만물과 공존할 수 있을까라고 상상해 봅니다.

사람이 작아지면 먹는 양과 소유하고자 하는 것들이 작아지지 않을까도 생각 들면서,

아무래도 공존이 쉬워질 것 같기도 하고요.

 

 

이파리가 크고 넓게, 너울너울 자란다고 ‘치마 아욱’,

많이 딸 수 있다고 ‘마니따 고추’,

뿌리가 장하게도 야물다고 ‘장한 열무’.

 

​서민 농부들의 그 씨앗에 대한 소망을 담아준 이름들이다.

풀과의 전쟁에서 완승을 거둔다고 장담하는 ‘제초 대첩’,

벌레들이 죽을 때까지 쫓아가리라 ‘부메랑 살충제’,

이걸 먹으면 쥐가 아리랑 춤을 추듯 비틀비틀 죽어 넘어 간다고 ‘아리랑 쥐약’.

슬프기도 하면서 재밌는 이름들이다.

유혹적인 상품 이름을 궁리했을 씨앗 회사와 농약회사

직원들이시여, 시인이 따로 없네요!

 

생명의 씨앗과 죽임의 농약.

씨앗을 사러 갔다가 시인은 두 세계의 극명한 갈라짐에 움찔하고,

인류의 삶과 식량 문제에 대해 새삼 생각해 본다.

‘슈퍼 옥수수/슈퍼 콩/슈퍼 소’. ‘슈퍼’가 붙은 유전자변형 종자들.

지구가 터져라 불어난 수의 인류를

먹여 살리기 위해 과학자들은 자연에 폭력을 가한다.

슈퍼란 말에서 우리는 이제 인류의 힘에 대한 경탄이

아니라 혐오와 공포를 느끼게 됐다.

​인류의 굶주림을 해결하는 거 중요하지.

시인은 인류와 자연이 공생할, 참으로 그럴싸한 상상을 펼친다.

식량을 늘릴 게 아니라 인간이 작아지면 어떨까?

몸집이 작아지면 조금만 먹어도 살 수 있잖아?

풀, 새, 물고기들은 지구의 어깨를 얼마나 가볍게 하는가.

 

그 상상을 따라가니 시인이 계산대 앞에서 들은 ‘푸른빛 쏟아질 듯

흔들리는 아욱 씨앗 소리’ 들리는 듯하다.

재작년에 넣어둔 꽃씨봉투를 서랍에서 꺼내 귀에 대고 흔들어본다.

찰찰찰찰찰 씨앗 소리, 정말 푸른빛 쏟아지는 ​것 같네!

 

     -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