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이야기/익어가는 하루(필사)

조용한 이웃 - 황인숙

물빛향기 2020. 8. 2. 20:52

조용한 이웃        - 황인숙

 

부엌에 서서

창 밖을 내다본다

높다랗게 난 작은 창 너머에

나무들이 살고 있다

나는 이따금 그들의 살림살이를 들여다본다

잘 보이지는 않는다

까치집 세 개와 굴뚝 하나는

그들의 살림일까?

꽁지를 까닥거리는 까치 두 마리는?

그 나무들은 수수하게 사는 것 같다

하늘은 그들의 부엌

지금의 식사는 얇게 저며서 차갑게 식힌 햇살이다

그리고 봄기운을 한두 방울 떨군

잔잔한 바람을 천천히 오래도록 삼키는 것이다

 

   - 시집<자명한 산책>(문학과 지성사, 2003)

 

 

우리 집 부엌에는 싱크대가 있고,

가스레인지가 있고, 그릇이 가득한 찬장이 있고,

의자가 네 개 딸린 식탁이 있고...

나무들의 하늘 부엌에는 까치집 세 개가 있고,

굴뚝 하나가 있고,

꽁지를 까딱거리는 까치 두 마리가 있고...

수수해서 나무들의 살림살이는 잘 보이지 않고,

수수하게 살아서 나무들의 일상은 말이 없고...

우리 집 수도꼭지는 자주 수다스럽고,

삼겹살은 숯불 위에서 지글거리고,

왕소금이 없다고 투덜거리고...

도대체 무엇을 위해 나는 오늘도

하루 종일 커피 잔처럼 달그락거리나?

얇게 저며서 차갑게 익힌 햇살과 잔잔한 바람을

천천히 오래도록 삼키는 나무들의 웰빙.

창 밖 나무들과 조용한 이웃으로 살아가는 한 시인의 웰빙!

 

                              - 강현국 시인

 

===

 

"식사는 얇게 저며서

차갑게 식힌 햇살이다."

 

싯구처럼

누군가 식사를 하고

호젓하게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삶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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