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이야기/에세이필사 289

여행의 이유(김영하) - 8

♣에세이 필사 7일차 아폴로 8호에서 보내온 사진 내가 세상에 나온 지 한 달 뒤인 1968년 12월, 인류는 처음으로 달 궤도를 돌았다. 아폴로 8호였다. 당시에는 대단했지만 다음해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자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거기로 옮겨가버렸다. 그러나 아폴로 8호의 세 명의 승무원들은 인류 최초로 달의 뒷면을 목격한 인물들이었다. 무엇보다 이들은 지구라는 행성이 달 표면에서 떠오르는 장면을 처음으로 촬영하기도 했다. 달 궤도에 성공적으로 진입해 네 바퀴째를 돌고 있을 때, 이들은 자신들이 떠나온 행성이 달 표면에서 떠오르는 모습을 목격하고 셔터를 눌렀다. 마침 크리스마스이브였고, 그것은 지구에 남겨진 다른 인류에게 보내는, 조금은 당황스러운 선물이었다. 이제는 너무도 익숙한, 그러나 당시로서는..

여행의 이유(김영하) - 7

♣ 에세이 필사 6일 차 그림자를 판 사나이 밤샘 시위자들이 설치한 각양각색의 텐트들로 뒤덮인 공원 구석구석엔 답지한 기부 물품들이 곳곳에 산처럼 쌓여 있었다. 텐트에선 대마초 냄새가 진하게 풍겨 나왔다. 수시로 피자가 배달되었고 사람들은 줄을 서서 하루 종일 피자를 먹었다. 나도 피자 한 조각을 배급받고 사방에 쌓여 있는 음료수 상자에서 생수를 꺼내 마셨다. 공원 한구석에는 도서관도 있었다. 사람들이 기부한 책에 OWS(Occupy Wall Street)라는 장서인만 찍어 보관하고 있었다. 누구라도 아무 절차 없이 책을 대출할 수 있었다. 통일된 조직 체계는 없었지만 주코티 공원은 자생적으로 작은 도시를 형성해가고 있었다. 텐트들이 모여 있는 주거지역과 토론과 회의가 열리는 일종의 아고라 같은 공적 공..

여행의 이유(김영하) - 6

♣에세이 필사 5일차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여행 시즌1의 첫 촬영지는 경상남도 통영이었다. 버스를 타고 내려가면서도 우리 출연자들은 제작진들로부터 어떤 지시도 받지를 못했다. 그들이 거듭하여 한 말은 ‘알아서 여행하시라’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과 동행하고 싶으면 하고, 혼자 가고 싶으면 가고, 마음대로 하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사파리에 풀어놓은 별로 위험하지 않은 동물인 셈이었다. 우리가 알아서 돌아다니면 제작진이 그걸 찍을 거라고만 했다. 출연자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일단 점심을 먹으러 갔고, 거기서부터 각자의 여행을 시작했다. 그 순간이 프로그램의 중요한 특성이 정해졌다. 나는 부두 근처 중국집에서 해물짬뽕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렌터카를 운전해 통영국제음악당이나 박경리기념관 등을 혼자 돌아다녔다...

여행의 이유(김영하) - 5

♣ 에세이 필사 4일차 상처를 몽땅 흡수한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호텔을 좋아하는 이유는 또 있다. 호텔은,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집이 아니다. 어떻게 다른가? 집은 의무의 공간이다. 언제나 해야 할 일들이 눈에 띈다. 설거지, 빨래, 청소 같은 즉각 처리 가능한 일도 있고, 큰맘 먹고 언젠가 해치워야 할 해묵은 숙제들도 있다. 집은 일터이기도 하다. 나는 컴퓨터 모니터만 봐도 마음이 무거워진다. 아니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들만 봐도 그렇다. 책들은 내가 언젠가는 하지 않으면 안 될 일, 그러나 늘 미루고 있는 바로 그 일, 글쓰기를 떠올리게 한다. 내가 소파에 누워 있는 순간에도 다른 작가들이 부지런히 멋진 책들을 쓰고 있다고, 그러니 어서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라고 질책하는 것만 같다. - 여행의 ..

여행의 이유(김영하) - 4

♣ 에세이 필사 3일차 여행하는 인간, 호모 비아토르 언덕 위에는 봉분들로 보이는 부드러운 융기들이 잔디로 덮여 있었다. 익숙한 풍경이었다. 경북 고령이나 부산 동래의 가야 고분군들이 바로 떠올랐다. 그리고 끝없이 이동하는 인류의 운명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했다. 유전자에 새겨진 이동의 본능, 여행은 어디로든 움직여야 생존을 도모할 수 있었던 인류가 현대에 남긴 진화의 흔적이고 문화일지도 모른다. 피곤하고 위험한데다 비용도 많이 들지만 여전히 인간은 여행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아니 인터넷 시대가 되면 수요가 줄어들 거라던 여행은 오히려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세계관광기구 통계에 따르면 인터넷이 아직 대중적으로 보급되기 전인 1995년에는 전 세계적으로 5억 2천만 명이 다른 나라로 여행을 떠났으나 2..

여행의 이유(김영하) - 3

♠에세이 필사 2일차 오직 현재 ‘여행에서 영감을 얻으시나요?’라는 질문은 작가라면 한번쯤 받아보는 것이다. 여행에서 영감을 얻은 기억이 나는 거의 없다. 영감이라는 게 있다면 언제나 나의 모국어로, 주로 집에 누워 있을 때 왔다. ‘작가라 좋으시겠어요. 세계 어디에서도 쓸 수 있잖아요?’ 같은 말도 자주 듣는다. 물론 세계 어디에서도 쓸 수는 있다. 『검은 꽃』은 과테말라의 안티구아에서 앞부분을 썼고,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뉴욕에서 시작해 거기서 끝냈다. 그러나 그게 전부다. 나는 많은 나라와 도시를 여행했고, 때로 한곳에서 몇 년 동안 머물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낸 스무 권이 넘는 책들 중에서 단 두 권만이 모국어로의 영토 밖에서 쓰였다. 심지어 여행기도 집으로 돌아와 썼다. 영감을 얻기 위해서 ..

여행의 이유(김영하) - 2

♣에세이 필사 1일차 추방과 멀미 ‘어쩌면 그는 비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최소한 비자가 필요한지 알아는 봐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최소한의 노력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는 중국에 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겪은 정신적 멀미의 괴로움이 아직도 남아 있었던 것이다. 중국은 그가 처음으로 가본 외국이었고, 젊은 날의 환상이 깨져나간 곳이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 다시 찾은 중국에서 추방되어 집으로 돌아온 그는 오히려 안온함을 느꼈다. 그는 비로소 오래 미루던 소설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했다. 아내는 집 밖으로 절대 나가선 안 된다고 다짐을 두었는데 그것이야말로 그가 진정으로 바라던 것이었다. 비밀의 벽장을 열고 ..

여행의 이유(김영하) - 1

♣ 에세이 필사 1일차 나는 호텔이 좋다. 모든 인간에게는 살아가면서 가끔씩은 맛보지 않으면 안 되는 반복적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가까운 사람들과 만나 안부를 묻고 마음을 나누는 시간을 주기적으로 갖는다거나, 철저히 혼자가 된다거나, 죽음을 각오한 모험을 떠나야 한다거나, 진탕 술을 마셔야 된다거나 하는 것들. ‘약발’이 떨어지기 전에 이런 경험을 ‘복용’해야, 그래야 다시 그럭저럭 살아갈 수가 있다. 오래 내면화된 것들이라 하지 않고 살고 있으면 때로 못 견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이런저런 합리화를 해가며 결국은 그것을 하고야 만다. (p.55) - 『여행의 이유』,(김영하, 문학동네) 단상) 나는 숲에서 걷는 것이 좋다. 나는 한주 동안의 모든 것을 걷기를 하면서 스트레스를 날려 보내기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