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이야기/익어가는 하루(필사)

잠복 - 유진목

물빛향기 2020. 2. 3. 21:28

잠복                          유진목

 

그 방에 오래 있다 왔다 거기서 목침을 베고 누운 남자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는 우는 것 같았고 그저 숨을 쉬는 건지도 몰랐다

 

부엌에 나가 금방 무친 나물과 함께 상을 들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 방에 있자니 오래된 아내처럼 굴고 싶어진 것이다 일으켜 밥을 먹이고 상을 물리고 나란히 누워 각자 먼 곳으로 갔다가 같은 이부자리에서 깨어나는 일

 

비가 온다 여보

 

당신도 이제 늙을 텐데 아직도 이렇게나 등이 아름답네요

 

검고 습한 두 개의 겨드랑이

 

이건 당신의 뼈

 

그리고 이건 당신의 고환

 

기록할 것이 많았던 연필처럼

 

여기는 매끄럽고 뭉둑한 끝

 

어떻게 적을까요

 

이불 한 채 방 한 칸

갓 지은 창문에 김이 서리도록 사랑하는 일을

 

      - 시집<연애의 책>(삼인, 2016)


* 잠복 : -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숨음.

             - 병에 감염되어 있으나 증상이 겉으로 나타나지 않음.

             - <천주> 잠시 동안의 행복이라는 뜻으로, 가톨릭에서 세속의 행복을 이르던 말. 




===  "이불 한 채 방 한 칸 갓 지은 창문에 김이 서리도록 사랑하는 일을​"


- 에로틱한 방 분위기가 연상되는 시(詩)이면서,

행복한 부부의 삶이 연상되며,

또한 금슬 좋고 세월을 보내는 부부를 떠올리게 하는 시(詩)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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