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이야기/익어가는 하루(필사) 205

대추 한알 - 장석주

23) 대추 한알 - 장석주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 시집 (대지, 2005) === 고향집에 대추 열매 고향 집 마당 한 구석에 알알이 영근 대추 열매, 사계절을 열매맺기 위해 고통과 아픔을 간직한 채, 풍성한 열매를 맺은 대추나무. 그러나 이젠 만날 수 없네. 도로가 생기는 이유로 고향집과 대추 나무를 볼 수 없다. 그동안 고생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느라고. 2019년 11월 30일(토) 부모님이 정든 고향을 떠나므로 고향집도 사라지고, 대추나무도 사라진다. 정든 고향이 사라지는 기분이다.

흙 - 문정희

22) 흙 - 문정희 흙이 가진 것 중에 제일 부러운 것은 그의 이름이다 흙흙흙 하고 그를 불러보라 심장 저 깊은 곳으로부터 눈물 냄새가 차오르고 이내 두 눈이 젖어온다 흙은 생명의 태반이며 또한 귀의처인 것을 나는 모른다 다만 그를 사랑한 도공이 밤낮으로 그를 주물러서 달덩이를 낳는 것을 본 일이 있다 또한 그의 가슴에 한 줌의 씨앗을 뿌리면 철 되어 한 가마의 곡식이 돌아오는 것도 보았다 흙의 일이므로 농부는 그것을 기적이라 부르지 않고 겸허하게 농사라고 불렀다 그래도 나는 흙이 가진 것 중에 제일 부러운 것은 그의 이름이다 흙흙흙 하고 그를 불러보면 눈물샘 저 깊은 곳으로부터 슬프고 아름다운 목숨의 메아리가 들려온다 하늘이 우물을 파놓고 두레박으로 자신을 퍼 올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시집 (민음사, ..

봄방 - 권혁웅

21) 봄방 - 권혁웅 전봇대에 윗옷 걸어두고 발치에 양말 벗어두고 천변 벤치에 누워 코를 고는 취객 현세와 통하는 스위치를 화끈하게 내려버린 저 캄캄함 혹은 편안한 그는 자신을 마셔버린 거다 무슨 맛이었을까? 아니 그는 자신을 저기에 토해놓은 거다 이번엔 무슨 맛이었을까? 먹고 마시고 토하는 동안 그는 그냥 긴 관(管)이다. 그가 전 생애를 걸고 이쪽저쪽으로 몰려다니는 동안 침대와 옷걸이를 들고 집이 그를 마중 나왔다 지갑은 누군가 가져간지 오래, 현세로 돌아갈 패스포트를 잃어버렸으므로 그는 편안한 수평이 되어 있다 다시 직립인간이 되지는 않겠다는 듯이 부장 앞에서 목이 굽은 인간으로 다시 진화하지 않겠다는 듯이 봄밤이 거느린 슬하, 어리둥절한 꽃잎 하나가 그를 덮는다 이불처럼 부의 봉투처럼 (미당문학..

너무 아픈 사랑 - 류근

20) 너무 아픈 사랑 - 류근 동백장 모텔에서 나와 뼈다귀 해장국집에서 소주잔에 낀 기름때 경건히 닦고 있는 내게 여자가 결심한 듯 말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 라는 말 알아요? 그 유행가 가사 이제 믿기로 했어요 믿는자에게 기쁨이 있고 천국이 있을 테지만 여자여, 너무 아픈 사랑도 세상에는 없고 사랑이 아닌 사랑도 세상에는 없는 것 다만 사랑만이 제 힘으로 사랑을 살아내는 것이어서 사랑에 어찌 앞뒤로 집을 지을 세간이 있겠느냐 택시비 받아 집에 오면서 결별의 은유로 유행가 가사나 단속 스티커처럼 붙여오면서 차창에 기대 나는 느릿느릿 혼자 중얼거렸다 그 유행가 가사, 먼 전생에 내가 쓴 유서였다는 걸 너는 모른다 - 시집(문학과 지성사,2010) 연상의 여인 - 김진래 술 한 잔에 만나던 ..

날아라 버스야! - 정현종

19) 날아라 버스야! - 정현종 내가 타고 다니는 버스에 꽃다발을 든 사람이 무려 두 사람이나 있다! 하나는 장미 ㅡ 여자 하나는 국화 ㅡ 남자 버스야 아무데로나 가거라. 꽃다발을 든 사람이 둘이나 된다. 그러니 아무데로나 가거라. 옳지 이륙을 하는구나! 날아라 버스스야, 이륙을 하여 고도를 높여가는 차체의 이 가벼움을 보아라. 날아라 버스야! - 시집(문학과 지성사,1999) === 이 시는 꽃을 든 사람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무엇 때문에 꽃을 들고 있을까? 받은 걸까? 아니면 전해주기 위해서,,, 아무튼 꽃을 보면 행복하다. 그 행복을 찾아서 어디론가 떠나고픈 생각이 든다. 이 시에서는 사람들이 버스를 타고 날아 가지만, 나는 그냥 훨훨 날아서 저 멀리 날아가고 싶다.

외계 - 김경주

18) 외계(外界) - 김경주 양팔이 없이 태어난 그는 바람만을 그리는 화가였다 입에 붓을 물고 아무도 모르는 바람들을 그는 종이에 그려 넣었다 사람들은 그가 그린 그림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붓은 아이의 부드러운 숨소리를 내며 아주 먼 곳까지 흘러갔다 오곤 했다 그림이 되지 않으면 절벽으로 기어 올라가 그는 몇 달씩 입을 벌렸다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색(色) 하나를 찾기위해 눈속 깊은 곳으로 어두운 화산을 내려 보내곤 하였다 그는, 자궁 안에 두고 온 자신의 두 손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 시집 (램덤하우스 중앙, 2006) === 시인의 아픈 마음을 아름다운 시로 표현 한 것이 너무 아름답고, 한 편으로는 가슴이 먹먹하다. 그래서 각자의 삶 속에서 인생의 절벽을 오르고, 그 곳에서 ..

말의 힘 - 황인숙

17) 말의 힘 - 황인숙 기분 좋은 말을 생각해보자. 파랗다. 하얗다. 깨끗하다. 싱그럽다. 신선하다. 짜릿하다. 후련하다. 기분 좋은 말을 소리내보자. 시원하다. 달콤하다. 아늑하다. 아이스크림. --얼음. 바람. 아아아. 사랑하는. 소중한. 달린다. 비! 머릿속에 가득 기분 좋은 느낌표를 밟아보자. 느낌표를 밟아보자. 만져보자. 핥아보자. 깨물어 보자. 맞아보자. 터드려보자! - 시집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문학과 지성사, 1998) === "말이 씨가 된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나는 얼마나 긍정적인 말을 하며 살고 있는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말이 바꾸면 인생이 바뀐다고 하니, 지금부터라도 긍정적인 말을 더 많이 헤야겠다. '감사합니다. 잘할 수 있어! 나는 행복해! 힘내세요 ..

오래된 기도 - 이문재

16) 오래된 기도 - 이문재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그렇게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으로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 꽃 진 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 놓기만 해도 솔숲 지나는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기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바다에 다 와가는 저문 강의 발원지를 상상하기만 해도 별동별의 앞쪽을 조금 더 주시하기만 해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