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이야기/익어가는 하루(필사) 205

작문 노트 - 문태준

205) 작문 노트 - 문태준 꽁지깃이 고운 새가 원고지에 내려앉는다 잘게 부스러진 글자를 쪼고 있다 나와 사월 사이 바람이 한들거린다 골격이 없는 남풍은 페이지에 숨는다 남풍은 나의 문장을 어루만진다 너의 부드러운 얼굴을 그려놓는다 작별의 눈물에 얼굴은 풀어진다 반복되는 질문과 습한 우울은 생겨난다 노트는 가랑잎처럼 다시 마른다 - 시집(문학동네, 2018)

사직서 쓰는 아침 - 전윤호

204) 사직서 쓰는 아침 - 전윤호 상기 본인은 일신상의 사정으로 인하여 이처럼 화창한 아침 사직코자 하오니 그간 볶아댄 정을 생각하여 재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머슴도 감정이 있어 걸핏하면 자해를 하고 산 채 잡혀 먹히기 싫은 심정으로 마지막엔 사직서를 쓰는 법 오늘 오후부터는 배가 고프더라도 내 맘대로 떠들고 가고픈 곳으로 가려 하오니 평소처럼 돌대가리 놈이라 생각하시고 뒤통수를 치진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 시집(다시, 2005)

진달래꽃 - 김소월

203) 진달래꽃 - 김소월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꽃을 사뿐히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때에는 죽어도아니 눈물흘리우리다 - 개벽 25호 1922년 7월 === 꽃샘추위로 움츠려지는 이른 봄에 바위옆에나 산비탈에 화려하지 않지만 분홍빛의 꽃을 피운다. 어릴 적에 진달래꽃잎을 따다가 어머니를 드리면, 맛있는 화전을 만들어 주시던 어머니가 생각난다.

불취불귀 不醉不歸 - 허수경

201) 불취불귀 不醉不歸 - 허수경 어느 해 봄 그늘 술자리였던가 그때 햇살이 쏟아졌던가 와르르 무너지며 햇살 아래 헝클어져 있었던가 아닌가 다만 마음을 놓아 보낸 기억은 없다 마음들끼리는 서로 마주 보았던가 아니었는가 팔 없이 안을 수 있는 것이 있어 너를 안았던가 너는 경계 없는 봄그늘이었는가 마음은 길을 잃고 저 혼자 몽생취사하길 바랐으나 가는 것이 문제였던가, 그래서 갔던 길마저 헝클어뜨리며 왔는가 마음아 나 마음을 보내지 않았다 더는 취하지 않아 갈 수도 올 수도 없는 길이 날 묶어 더 이상 안녕하기를 원하지 않았으나 더 이상 안녕하지도 않았다 봄그늘 아래 얼굴을 묻고 나 울었던가 울기를 그만두고 다시 걸었던가 나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만 없다 - 시집(문학과지성사, 2007(1992) 불취불귀..

걱정하지 마 걱정하지 마 - 최승자

200) 걱정하지 마 걱정하지 마 - 최승자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죽는 것도 아니어서 우연히 연기처럼 모였다 흩어지는 걸까 오늘도 북해의 물고기 하나 커다란 새 한 마리로 솟구쳐 오르고 걱정하지 마 걱정하지 마 속살속살 눈 내리는 밤 멀리서 침묵하고 있는 대상이 이미 우리 가운데 그윽히 스며 있다 - 現代文學 2010년 11월호 (통권 671호), 현대문학(2010년 11월 1일) * 속살속살 : 남이 알아듣지 못하도록 작은 목소리로 조금 수다스럽게 자꾸 이야기하는 소리를 나타내는 말 - 인생은 보석의 빛이 결코 아니요. 뿌옇게 타오르는 모깃불이라 - 토지 - 걱정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 - 티벳속담 ♣ 나만의 생각) 사람은, 필연으로 이 땅에 연기처럼 모였다가 흩어지는 존재로서, 오늘도 우..

나무의 일 - 오은

199) 나무의 일 - 오은 나무가 책상이 되는 일 잘리고 구멍이 뚫리고 못이 박히고 낯선 부위와 마주하는 일 모서리를 갖는 일 나무가 침대가 되는 일 나를 지우면서 너를 드러내는 일 나를 비우면서 너를 채우는 일 부피를 갖는 일 나무가 합판이 되는 일 나무가 종이가 되는 일 점점 얇아지는 일 나무가 연필이 되는 일 더 날카로워지는 일 종이가 된 나무가 연필이 된 나무와 만나는 일 밤새 사각거리는 일 종이가 된 나무와 연필이 된 나무가 책상이 된 나무와 만나는 일 한 몸이었던 시절을 떠올리며 다음 날이 되는 일 나무가 문이 되는 일 그림자가 드나들 수 있게 기꺼이 열리는 일 내일을 보고 싶지 않아 굳게 닫히는 일 빗소리를 그리워하는 일 나무가 계단이 되는 일 흙에 덮이는 일 비에 젖는 일 사이를 만들어 ..

모래 여자 - 김혜순

198) 모래 여자 - 김혜순 모래 속에서 여자를 들어올렸다 여자는 머리털 하나 상한 데가 없이 깨끗했다 여자는 그가 떠난 후 자지도 먹지도 않았다고 전해졌다 여자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숨을 쉬지도 않았지만 죽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와서 여자를 데려갔다 옷을 벗기고 소금물에 담그고 가랑이를 벌리고 머리털을 자르고 가슴을 열었다고 했다 여자의 그가 전장에서 죽고 나라마저 멀리멀리 떠나버렸다고 했건만 여자는 목숨을 삼킨 채 세상에다 제 숨을 풀어놓진 않았다 몸속으로 칼날이 들락거려도 감은 눈 뜨지 않았다 사람들은 여자를 다시 꿰매 유리관 속에 뉘었다 기다리는 그는 오지 않고 사방에서 손가락들이 몰려왔다 모래 속에 숨은 여자를 끌어올려 종이 위에 부려놓은 두 손을 날마다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낙타를 타고 이곳을..

첫사랑 - 이정록

첫사랑 - 이정록 헤어진 지 열흘이 됐다. 나는, 약물 과다 복용으로 죽을 것이다. 세월이 약이라면 - 청소년 시집(창비교육, 2017) = = = 첫사랑 = 맨 처음으로 느끼거나 맺은 사랑, 이루어지기가 어렵다고 하는 말이 있다. 순수한 사랑을 벌써 38년이 지났다. 그때 철었던 시절에 만난 그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네. 풋풋해서 좋았고, 아픔으로 끝난 첫사랑, 헤어진 아픔이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