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 진은영 가족 - 진은영 밖에선 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 집에만 가져가면 꽃들이 화분아 다 죽었다 - 시집(문학과 지성사, 2003) = = = 집에만 오면 - 김진래 꽃집에선 그토록 아름답고 빛나는 것들이 집에만 오면 며칠을 못 간다 새로 이사한 집에서도 아이들이 또 꽃, 나무, 아니면 상추, 고추를 심자고 하는데 나는 반대 한다 === 꽃이나 나무가 좋아서 사 오지만 얼마를 살지 못하고 내 곁을 떠나 간다. 독서이야기/익어가는 하루(필사) 2020.09.29
봄 - 반칠환 봄 - 반칠환 저 요리사의 솜씨 좀 보게 누가 저걸 냉동 재룐 줄 알겠나 푸릇푸릇한 저 싹도 울긋불긋한 저 꽃도 꽝꽝 언 냉장고에서 꺼낸 것이라네 아른아른 김조차 나지 않는가 - 시집(시와 사학사, 2005) === 냉장고에 꽝꽝 언 재료로 싱싱하고 상큼한 봄향기를 느낄 수 있게 미각을 일깨워 주는 식탁에 앉는다. === 조그마한 냇가 조그마한 냇가에 물고기가 놀고 이름모를 풀꽃도 피어나서 반겨주네 독서이야기/익어가는 하루(필사) 2020.09.28
괴물 - 최영미 괴물 - 최영미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K의 충고를 깜빡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 Me too 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 몇 년 뒤, 어느 출판사 망년회에서 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내가 소리쳤다 "이 교활한 늙은이야!" 감히 삼십년 선배를 들이박고 나는 도망쳤다 En이 내게 맥주잔이라도 던지면 새로 산 검정색 조끼가 더러워질까봐 코트자락 휘날리며 마포의 음식점을 나왔는데. 100권의 시집을 펴낸 "En은 수도꼭지야. 틀면 나오거든 그런데 그 물은 똥물이지 뭐니" (우리끼리 있을 때) 그를 씹은 소설가 박 선생도 En의 몸집이 커져 괴물이 되자 입을 다물었다 자기들이 먹는 물이 똥물인지도 모르는.. 독서이야기/익어가는 하루(필사) 2020.09.28
갈대 - 신경림 갈대 - 신경림 언제부터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ㅡ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 1956 / 시집(창비, 1975) === 산 위에 호수(호명호수) 진달래, 개나리, 벚꽃 아름답게 피었네 봄바람 불고 꽃도 피고 나의 인생에도 아름다운 꽃을 피워야 하는데,,, 독서이야기/익어가는 하루(필사) 2020.09.21
지울 수 없는 얼굴 - 고정희 지울 수 없는 얼굴 - 고정희 냉정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얼음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불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무심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징그러운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부드러운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그윽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따뜻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내 영혼의 요람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샘솟는 기쁨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아니야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당신이라 썼다가 이 세상 지울 수 없는 얼굴 있음을 알았습니다 - 연시집(들꽃세상, 1990) = = = 사랑하는 당신 ,,, 환한 미소가 기분 좋게하는 '글그램 사진'의 미소처럼 지울 수 없는 얼굴로 기억되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기분 좋은 미소로 행복한 하루하루 되세요. 독서이야기/익어가는 하루(필사) 2020.09.14
네모를 향하여 - 최승호 네모를 향하여 - 최승호 은행 계단 앞 은행나무 잎사귀들이 땡볕에 지쳐 축 늘어져 있다 이 여름 도시에선 모두들 얼마나 피곤하게 살아오고 또 죽어 가는지 빌딩 입구의 늙은 수위는 의무를 다하느라 침을 흘리며 눈을 뜬 채로 자면서도 빌딩을 지키고 있다 자라나는 빌딩들의 네모난 유리 속에 갇혀 네모 나는 인간의 네모난 사고방식, 그들은 네모난 관 속에 누워서야 비로소 네모를 이해하리라 ━ 우리들은 네모 속에 던져지는 주사위였지 주사위를 던지는 사람은 아니었다고 - 시집(문학과 지성사, 1985) 네모 속에 태어남 네모 속에 살아감 네모 속에 죽어감 네모 속에 영면함 네모에 맞춰 살아가며, 네모를 향하여 행진하는 나, 오늘도 행복한 네모의 삶이 되자! - 김승희 시인의 글 인용함. ===> 시를 통해, 우리가.. 독서이야기/익어가는 하루(필사) 2020.09.13
밥 - 허연 190) 밥 - 허연 세월이 가는 걸 잊고 싶을 때가 있다. 한순간도 어김없이 언제나 나는 세월의 밥이었다. 찍소리 못하고 먹히는 밥. 한순간도 밥이 아닌 적이 없었던 돌아보니 나는 밥으로 슬펐고, 밥으로 기뻤다. 밥 때문에 상처받았고, 밥 때문에 전철에 올랐다. 밥과 사랑을 바꿨고, 밥에 울었다. 그러므로 난 너의 밥이다. - 시집(민음사, 2008) === 세월은 나와 함께 먹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무수한 세월 속에 나는 밥을 먹고 그 밥을 벌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마음이 아파 울면서 그 밥을 먹고 살아 왔다. 세월의 품에 안겨서 떠 먹여 주는 밥을 먹고 살아왔다. 또한 이 생명 다하는 그날까지 밥을 먹고 걸어간다. 독서이야기/익어가는 하루(필사) 2020.09.12
바짝 붙어서다 - 김사인 바짝 붙어서다 - 김사인 굽은 허리가 신문지를 모으고 빈 상자를 접어 묶는다 몸뻬는 졸아든 팔순을 담기에 많이 헐겁다 승용차가 골목 안으로 들어오자 바짝 벽에 붙어선다 유일한 혈육인 양 작은 밀차를 꼭 잡고 고독한 바짝 붙어서기 더러운 시멘트벽에 거미처럼 수조 바닥의 늙은 가오리처럼 회색 벽에 낮고 낮은 저 바짝 붙어서기 차가 지나고 나면 구겨졌던 종이같이 할머니는 천천히 다시 펴진다 밀차의 바퀴 두개가 어린 염소처럼 발꿈치를 졸졸 따라간다 늦은 밤 그 방에 켜질 헌 삼성 테레비를 생각하면 기운 싱크대와 냄비들 그 앞에 선 굽은 허리를 생각하면 목이 멘다 방 한구석 힘주어 꼭 짜놓았을 걸레를 생각하면 - 시집(창비, 2015) === 거리에서 폐지를 줍어도 보았다. 낮에 다른 일을 하고, 저녁부터 새벽까.. 독서이야기/익어가는 하루(필사) 2020.08.24
인간성에 대한 반성문 2 - 권정생 인간성에 대한 반성문 2 - 권정생 도모꼬는 아홉 살 나는 여덟 살 이학년인 도모꼬가 일학년인 나한테 숙제를 해달라고 자주 찾아왔다. 어느 날, 윗집 할머니가 웃으시면서 도모꼬는 나중에 정생이한테 시집가면 되겠네 했다. 앞집 옆집 이웃 아주머니들이 모두 쳐다보는 데서 도모꼬가 말했다. 정생이는 얼굴이 못생겨 싫어요! 오십 년이 지난 지금도 도모꼬 생각만 나면 이가 갈린다. - 시집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지식산업사, 1988) 인간성에 대한 반성문 1 ㅡ 권정생 주중식한테서 소포가 왔다 끌러 보니 조그만 종이 상자에 과자가 들었다 가게에서 파는 과자가 아니고 집에서 만든 것 같다 소포에다 폭탄도 넣어 보냈다는데... 잠깐 동안 주중식과 나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생각했다 십 년이 넘도록 알고 .. 독서이야기/익어가는 하루(필사) 2020.08.22
슬픔은 헝겊이다 - 문정희 슬픔은 헝겊이다 ㅡ 문정희 슬픔은 헝겊이다 둘둘 감고 산다 날줄 씨줄 촘촘한 피륙 옷을 지어 입으면 부끄러운 누추를 가릴 수 있을까 살아있는 것들 파득거리는 싱싱한 헝겊에서 새소리가 들린다 왜 우느냐고 물어보고 싶다 아픔의 바늘로 새긴 무늬에서 별들이 쏟아질 때도 있다 별처럼 깊은 헝겊으로 이름 하나를 지어 입으면 비로소 밤은 따스할까 그 옷을 은총이라고 불러도 될까 슬픔은 헝겊이다 둘둘 감고 간다 — 《Littor릿터》2017년 봄호, 《시와 표현》2017년 11월호 재수록 === 슬픔은 헝겊이다 어린 시절에만 해도 헝겊을 이용해서 구멍난 옷에 , 양말에 꿰메어 입고, 신고 했다. 독서이야기/익어가는 하루(필사) 2020.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