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이야기/익어가는 하루(필사) 205

어떤 마을 - 도종환

어떤 마을 - 도종환 사람들이 착하게 사는지 별들이 많이 떴다. 개울물 맑게 흐르는 곳에 마을을 이루고 물바가지에 떠 담던 접동새 소리 별 그림자 그 물로 쌀을 씻어 밥 짓는 냄새 나면 굴뚝 가까이 내려오던 밥티처럼 따스한 별들이 뜬 마을을 지난다. 사람이 순하게 사는지 별들이 참 많이 떴다. - 시집(문학동네, 2012) 울고 넘는 박달재 - 박재홍 천둥산 박달재를 울고넘는 우리임아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비에 젖는구려 왕거미 집을 짓는 고개마다 구비마다 울었오 소리쳤오 이 가슴이 터지도록 부엉이 우는 산골 나를 두고 가는 임아 둘아올 기약이나 성황님께 빌고가소 도토리 묵을 싸서 허리춤에 달아주며 한사코 우는구나 박달재의 금봉이야 === 삶이란 한없이 깊은 오지다. 빛과 그늘의 눈금에서 빛나는 일광이 눈부..

시어(詩語) 가게에서 - 최승호

시어(詩語) 가게에서 - 최승호 수평선 900원 구름 500원 아지랑이 1000원 저녁 어스름 800원 길 300원 마음 500원 나라 100원 풀잎 400원 아스팔트 100원 빌딩 100원 노을 900원 바다 700원 고래 600원 욕망 100 하나님 200원 시궁쥐 400원 절간 200원 이슬 900원 천둥 500 미소 800원 깨달음 100원 발톱 300원 배꼽 1000원 따오기 900 북회귀선 400원 변기 200원 물푸레나무 700원 침대 300원 폐허 600원 섹스 100원 냉이꽃 900원 허무 200원 밤 두 시 800원 개똥 900원 다이아몬드원 늑대 700원 공룡 400원 여울 1000원 하루살이 900원 바보 800원 귀뿔 100원 은하수 600원 달빛 900원 조개껍질 300원 모래톱..

처용 아내의 노래 - 문정희

처용 아내의 노래 - 문정희 아직도 저를 간통녀로 알고 계시나요. 허긴 천년동안 이 땅은 남자들 세상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서라벌엔 참 눈물겨운 게 많아요. 석불 앞에 여인들이 기도 올리면 한겨울에 꽃비가 오기도 하고 쇠로 만든 종소리 속에 어린 딸의 울음이 살아 있기도 하답니다. 우리는 워낙 금슬 좋기로 소문난 부부 하지만 저는 원래 약골인 데다 몸엔 늘 이슬이 비쳐 부부 사이를 만 리나 떼어 놓았지요. 아시다시피 제 남편 처용랑은 기운찬 사내, 제가 안고 있는 병을 샛서방처럼이나 미워했다오. 그날 밤도 자리 펴고 막 누우려다 아직도 몸을 하는 저를 보고 사립 밖으로 뛰어나가 한바탕 춤을 추더라구요. 그이가 달빛 속에 춤을 추고 있을 때 마침 저는 설핏 잠이 들었는데 아마도 제가 끌어안은 개짐이 털 난 ..

나비 - 김사인

나비 - 김사인 오는 나비이네 그 등에 무엇일까 몰라 빈 집 마당켠 기운 한낮의 외로운 그늘 한 뼘일까 아기만 혼자 남아 먹다 흘린 밥알과 김칫국물 비어져 나오는 울음일까 나오다 턱에 앞자락에 더께지는 땟국물 같은 울음일까 돌보는 이 없는 대낮을 지고 눈시린 적막 하나 지고 가는데, 대체 어디까지 가나 나비 그 앞에 고요히 무릎 꿇고 싶은 날들 있었다. -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창비, 2006) === 흑백 사진 한 컷 안에 날아든 나비 정지 화면에서 홀로 너울너울 날아가 버린다. 모든 순간이 사람마다 다 특별함을 표현하고 살아간다. 그러나 모르고 살아갈 때도 있다.

농담 한송이 - 허수경

농담 한송이 - 허수경(1964년~2018) 한 사람의 가장 서러운 곳으로 가서 농담 한 송이 따서 가져오고 싶다 그 아린 한 송이처럼 비리다가 끝끝내 서럽고 싶다 나비처럼 날아가다가 사라져도 좋을 만큼 살고 싶다. - 시집 (문학과지성사, 2016년) === 나비처럼 인생의 가장 서러운 곳으로 가서 농담 한 송이 따서 가져오고 싶다 그 서러움과 슬픔과 아픔을 버릴 수 있도록 나비처럼 날아가서 사라져도 좋을만큼 살고 싶다.

별을 보며 - 이성선

별을 보며 - 이성선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별아, 어찌하랴 이 세상 무엇을 쳐다보리 흔들리며 흔들리며 걸어가던 거리 엉망으로 술에 취해 쓰러지던 골목에서 바라보면 너 눈물 같은 빛남 가슴 어지러움 황홀히 헹구어 비치는 이 찬란함마저 가질 수 없다면 나는 무엇으로 가난하랴 - 시선집(미래사, 1991) === 새벽 출근길에 하늘을 쳐다보면 별들은 나를 보네 너의 빛남을 인해 너의 찬란함을 볼 때 나는 무엇이 되리.

봄의 정원으로 오라 - 잘랄루딘 루미

160) 봄의 정원으로 오라 - 잘랄루딘 루미 봄의 정원으로 오라 이곳에 꽃과 술과 촛불이 있으니 만일 당신이 오지 않는다면 이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만일 당신이 온다면 이것들이 또한 무슨 의미가 있는가 === 가는 봄이 아쉬워서 봄의 정원으로 오라는 시를 올려봅니다. 2020년 봄을 코로나 19 때문에,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보내게 되네요.

청춘 - 오은

청춘 - 오은 거센소리로 머물다가 된소리로 떠나는 일 칼이 꽃이 되는 일 피가 뼈가 되는 일 어떤 날에는 내 손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내 손은 내가 아니니까 내 마음이 아니니까 자유는 늘 부자연스러웠다 몸의 부기를 빼는 일 마음을 더는 일 다시 예사소리로 되돌리는 일 꿈에서 나와 길 위에 섰다 아직, 꿈길 같았다 - 시집『유에서 유』(문학과지성사, 2016) === 언제나 청춘인데, 청춘같이 살고자 한다. 청춘! 꿈 같은 시절 돌아가갈 수 있다면 좋으련만, 청춘! 듣기만 해도 즐겁고 행복하다. 지금도 청춘이지만, 세월은 흘러가네.

아도니스를 위한 연가 - 최영미

아도니스를 위한 연가 - 최영미 너의 인생에도 한 번쯤 휑한 바람이 불었겠지 바람에 갈대숲이 누울 때처럼 먹구름에 달무리 질 때처럼 남자가 여자를 지나간 자리처럼 시리고 아픈 흔적을 남겼을까 너의 몸 골목골목 너의 뼈 굽이 굽이 상처가 호수처럼 괴어 있을까 너의 젊은 이마에도 언젠가 노을이 꽃잎처럼 스러지겠지 그러면 그 때 그대와 나 골목골목 굽이 굽이 상처를 섞고 흔적을 비벼 너의 심장 가장 깊숙한 곳으로 헤엄치고프다, 사랑하고프다. - 시집 (창비, 1994, 초판 / 창비, 2015, 개정판) 시집 '창비'에 발표된 최영미의 시입니다. 그녀의 최초 시집인 '서른, 잔치는 끝났다.'가 아주 유명했답니다. 서울대 출신에 학생 운동도 했었고 재작년에 미투 운동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시 "괴물(황해문..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 나태주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 나태주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너무 섭섭하게 그러지 마시어요. 하나님, 저에게가 아니에요 저의 아내 되는 여자에게 그렇게 하지 말아 달라는 말씀이어요 이 여자는 젊어서부터 병과 함께 약과 함께 산 여자예요 세상에 대한 꿈도 없고 그 어떤 사람보다도 죄를 안 만든 여자예요 신발장에 구두도 많지 않은 여자구요 한 남자 아내로서 그림자로 살았고 두 아이 엄마로서 울면서 기도하는 능력밖엔 없었던 여자이지요 자기의 이름으로 꽃밭 한 평 채전밭 한 뙈기 가지지 않은 여자예요 남편 되는 사람이 운전조차 할 줄 모르고 쑥맥이라서 언제나 버스만 타고 다닌 여자예요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가난한 자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 저의 아내 되는 사람에게 너무 섭섭하게 하지 마시어요. - 시화집『너도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