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이야기/익어가는 하루(필사) 205

파리 - 장석주

파리 ― 장석주 비굴했다, 평생을 손발 빌며 살았다. 빌어서 삶을 구하느라 지문이 다 닳았다. 끝끝내 벗지 못하는 이 남루! - 시집(민음사, 2010) === 인생 비굴하지 않게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지금까지 열심히 살았다 처자식 고생 안 시키고 그래도 남에게 아쉬운 소리 안하고 잘 살고 있다. 파리채 - 김진래 비참했다 항상 손발 빌며 사는 파리를 향해 전진하는 파리채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탁! 딱! 끝끝내 벗지 못하는 이 허탈하다. * 장석주시인의 '파리'를 읽고서 바꿔 써 봄.

숲에 관한 기억 - 나희덕

숲에 관한 기억 - 나희덕 너는 어떻게 내게 왔던가? 오기는 왔던가? 마른 흙을 일으키는 빗방울처럼? 빗물 고인 웅덩이처럼? 젖은 나비 날개처럼? 숲을 향해 너와 나란히 걸었던가? 꽃그늘에 입을 맞추었던가? 우리의 열기로 숲은 좀 더 붉어졌던가? 그때 너는 들었는지? 수천 마리 벌들이 일제히 날개 떠는 소리를? 그 황홀한 소음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 사랑은 소음이라고? 네가 웃으며 그렇게 말했던가? 그 숲이 있기는 있었던가? 그런데 웅웅거리던 벌들은 다 어디로 갔지? 꽃들은, 너는, 어디에 있지? 나는 아직 나에게 돌아오지 못했는데? - 시집(창비, 2009) === 숲속에 있으면 편안함이 있어서 좋았다.

산수유 - 나태주

산수유 - 나태주 아프지만 다시 봄 그래도 시작하는 거야 다시 먼 길 떠나보는 거야 어떠한 경우에도 나는 네 편이란다. - 시집(지혜, 2017) 너 자신을 알라. - 소크라테스 투쟁은 만물의 아버지이다. - 헤라클레이토스 인간이 만물의 척도이다. - 프로타고라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 데카르트 신은 죽었다. - 니체 세계는 범죄의 표상이다. - 반경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 - 마르크스 아픔은 활이 되고, 희망은 화살이 된다. 아픈 만큼 더 멀리 날아가고, 아픈 만큼 더 정확하게 과녁을 맞출 수 있다. 너희들 뒤에는 내가 있다! 오직, 전진하고, 또 전진하라! 문화적 영웅, 즉, 대시인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느닷없이 출현하다. 오오, 홍익인간이여! 오오, 나태주 시인이여!..

슬픔이 하는 일 - 이영광

슬픔이 하는 일 - 이영광 슬픔은 도적처럼 다녀간다 잡을 수가 없다 몸이 끓인 불, 울음이 꽉 눌러 터뜨리려 하면 어디론가 빠져 달아나버린다 뒤늦은 몸이 한참을 젖다 시든다 슬픔은 눈에 비친 것보다는 늘 더 가까이 있지만, 깨질 듯 오래 웃고 난 다음이나 까맣게 저를 잊은 어느 황혼, 방심한 고요의 끝물에도 눈가에 슬쩍 눈물을 묻혀두고는 어느 결에 사라지고 없다 슬픔이 와서 하는 일이란 겨우 울음에서 소리를 훔쳐내는 일 - 시집(창비, 2013) = = = 슬픔 보다는 기쁨이 넘치는 하루가 되기를,,,

조용한 이웃 - 황인숙

조용한 이웃 - 황인숙 부엌에 서서 창 밖을 내다본다 높다랗게 난 작은 창 너머에 나무들이 살고 있다 나는 이따금 그들의 살림살이를 들여다본다 잘 보이지는 않는다 까치집 세 개와 굴뚝 하나는 그들의 살림일까? 꽁지를 까닥거리는 까치 두 마리는? 그 나무들은 수수하게 사는 것 같다 하늘은 그들의 부엌 지금의 식사는 얇게 저며서 차갑게 식힌 햇살이다 그리고 봄기운을 한두 방울 떨군 잔잔한 바람을 천천히 오래도록 삼키는 것이다 - 시집(문학과 지성사, 2003) 우리 집 부엌에는 싱크대가 있고, 가스레인지가 있고, 그릇이 가득한 찬장이 있고, 의자가 네 개 딸린 식탁이 있고... 나무들의 하늘 부엌에는 까치집 세 개가 있고, 굴뚝 하나가 있고, 꽁지를 까딱거리는 까치 두 마리가 있고... 수수해서 나무들의 살..

화장(花葬) - 복효근

화장(花葬) - 복효근 각시원추리 시든 꽃앞 사이에 호랑나비 한 마리 죽은 채 끼어 있다 시들어 가는 꽃의 중심에 닿기 위하여 나비는 최선을 다하여 죽어 갔으리라 꽃잎에 앉아 죽어가는 나비를 꽃은 사력을 다하여 껴안았으리라 폼페이 화산재 속에서 껴안은 채 발견된 연인의 화석처럼 서로에게 스며들고 있었다 서로에게 소멸되고 있었다 다시 노란 조등 하나가 켜지고 어느 궁극에 닿았다는 것인지 문득 죽음 너머까지가 환하다 - 2015년 겨울호 === 나비로 존재하다가 죽어가면서까지 최선을 다한 호랑나비와 그런 나비를 꼬옥 안아준 각시원추리꽃,,, 이 나비와 꽃처럼, 나는 내짝과 서로에게 스며들고 있는가? 각시원추리꽃의 중심에서 나비는 최후의 시간을 맞이하는 것처럼, 나의 삶도 아름답게 편안하게 흔들리면서 마무리하..

러브 어페어 - 진은영

180) 러브 어페어* - 진은영 그런 남자랑 사귀고 싶다 아메리카 국경을 넘다 사막에 쓰러진 흰 셔츠 멕시코 청년... 너와 결혼하고 싶다 바그다드로 가서 푸른 장미 꽃봉오리 터지는 소리가 폭탄처럼 크게 들리는 고요한 시간에 당신과 입맞춤하고 싶다 학살당한 손들이 치는 다정한 박수를 받으면서 크고 투명한 물방울 속에 우리는 함께 누워 물을 것입니다 지나가는 은빛 물고기에게, 학살자의 나라에서도 시가 씌어지는 아름답고도 이상한 이유를. - 시집『우리는 매일매일』(문학과지성사, 2008) === * 러브 어페어(love affair) : 직역하면 '사랑사건' 혹은 '사랑놀음' - 작은 사건이나 개인적인 문제 따위를 일컫는 말. - 한 때의 사랑이나 일시적인 정사, 연애사건. 전쟁 속에서도 사랑을 꽃피고, ..

해피 버스데이 - 오탁번

해피 버스데이 - 오탁번 시골 버스 정류장에서 할머니와 서양 아저씨가 읍내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시간이 제멋대로인 버스가 한참 후에 왔다 -왔 데이! 할머니가 말했다 할머니 말을 영어인 줄 알고 눈이 파란 아저씨가 오늘은 월요일이라고 대꾸했다 -먼데이! 버스를 보고 뭐냐고 묻는 줄 알고 할머니가 친절하게 말했다 -버스데이! 오늘이 할머니의 생일이라고 생각한 서양 아저씨가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해피 버스데이 투 유! (할머니와 아저씨를 태운 행복한 버스가 힘차게 달렸다) - 시집(시안, 2011) === 이 시는 읽을 때마다, 웃음짓게 하는 시(詩)인것 같다. - 왔데이!~~~ - 먼데이!~~~ - 버스데이!~~~ - 해피버스데이~ 투유!~~~ 행복 바이러스가 전파되는 좋은 시이다.

가늠 - 이병률

가 늠 - 이병률 종이를 깔고 잤다 누우면 얼마나 뒤척이는지 알기 위하여 나는 처음의 맨 처음인 적 있었나 그 오래전 옛날인 적도 없었다 나무 밑에 서 있어보았다 다음 생은 나무로 살 수 있을까 싶어 이 별에서의 얼룩들은 알은체하지 않기로 했고 저 별들은 추워지면 쓰려고 한다 그 언젠가 이 세상에 돌아왔을 적에 그 언제 좋아하는 것으로부터 멀리 달아났을 때 이 땅의 젖꼭지를 꼭 쥐고 잠들었다 얼마나 놓지 않을 수 있을까 싶어서 — 시집『눈사람 여관』(문학과지성사, 2013) === 가늠 : 어떤 목표나 기준에 맞는지 안 맞는지 헤아려 봄 시인의 싯구처럼 종이를 깔고 자 본 기억있다. 어느 단체 모임에서 덮을 이불만 있어서, 종이 박스를 깔고 누웠다. 얼마나 뒤척이며 잠들기도 했다.

여수 - 서효인

여수 - 서효인 사랑하는 여자가 있는 도시를 사랑하게 된 날이 있었다 다시는 못 올 것이라 생각하니 비가 오기 시작했고, 비를 머금은 공장에서 푸른 연기가 쉬지 않고 공중으로 흩어졌다 흰 빨래는 내어놓질 못했다 너의 얼굴을 생각 바깥으로 내보낼 수 없었다 그것은 나로 인해서 더러워지고 있었다 이 도시를 둘러싼 바다와 바다가 풍기는 살냄새 무서웠다 버스가 축축한 아스팔트를 감고 돌았다 버스의 진동에 따라 눈을 감고 거의 다 깨버린 잠을 붙잡았다 도착 이후에 끝을 말할 것이다 도시의 복판에 이르러 바다가 내보내는 냄새에 눈을 떴다 멀리 공장이 보이고 그 아래에 시커먼 빨래가 있고 끝이라 생각한 곳에서 다시 바다가 나타나고 길이 나타나고 여수였다 너의 얼굴이 완성되고 있었다 이 도시를 사랑할 수밖에 없음을 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