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이야기/익어가는 하루(필사) 205

좋은 날 - 천양희

좋은 날 - 천양희 작은 꽃이 언제 다른 꽃이 크다고 다투어 피겠습니까 새들이 언제 허공에 길 있다고 발자국 남기겠습니까 바람이 언제 정처 없다고 머물겠습니까 강물이 언제 바쁘다고 거슬러 오르겠습니까 벼들이 언제 익었다고 고개 숙이지 않겠습니까 아이들이 해 지는 줄 모르고 팽이를 돌리고 있습니다 햇살이 아이들 어깨에 머물러 있습니다 무진장 좋은 날입니다 - 시집(창비, 2005) === 여름 꽃들이 앞 다투어 피고 있다. 새들의 재잘거림에 쳐다보게 되고 바람은 살랑살랑 불면서 하늘은 흐려서 비가 또 올 것 같다. 그래도 오늘도 내일도 좋은 날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살아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 순례 11 - 오규원

살아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 순례 11 - 오규원 살아 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튼튼한 줄기를 얻고 잎은 흔들려서 스스로 살아 있는 몸인 것을 증명한다. 바람은 오늘도 분다. 수만의 잎은 제각기 몸을 엮는 하루를 가누고 들판의 슬픔 하나 들판의 고독 하나 들판의 고통 하나도 다른 곳에서 바람에 쓸리며 자기를 헤집고 있다. 피하지 마라 빈들에 가서 깨닫는 그것 우리가 늘 흔들리고 있음을. - 시집(초판, 민음사, 1973 / 문학동네, 1997) === ◈ 순례(Pilgr image) = 나그네, 신성한 곳을 찾아가는 여행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온 말. ◈ 인생이란 들판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것과 비슷함. 바람에 스치면, 살아나는 것들이 있다. 모든 생명들은 몸부림치며, 아프게 살아가며 희망의 새싹을 피우고 있다..

시집(詩集) - 윤석위

시집(詩集) - 윤석위 시집(詩集)을 사는 일은 즐겁다 그 중에서도 아이들 책을 사다가 모르는 이의 불꽃같은 시가 있는 시집(詩集)을 덤으로 사는 일은 즐겁다 - 시집(동학사, 2000) === 시집(詩集)을 사는 일은 아직도 망설인다. 서점에서도 인문서적, 에세이, 소설, 기행문 등은 읽고 싶으면 쉽게 사기도 하는데, 시집은 덤으로라도 사는 것이 아직도 망설이게 된다. 함축된 언어로 살아 춤추는 시(詩이)라고 하지만, 불꽃같다고 표현하는 시인처럼, 감탄사가 나오는 시를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많은 시(詩)를 필사를 하고 있지만, 시집(詩集)을 사는 것을 망설이지 않고 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여우난골족(族) - 백석

여우난골족(族) - 백석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머니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루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 나무가 많은 신리(新理) 고모 고모의 딸 이녀(李女) 작은 이녀 열여섯에 사십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土山) 고무 고무의 딸 승녀(承女) 아들 승동이 육십리(六十里)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옷이 정하든 말끝에 설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홍녀(洪女) 아들 흥동이 작은 흥동이 배나무 접을 잘하는 주정을 하..

책 읽으며 졸기 - 김기택

책 읽으며 졸기 - 김기택 잠이 깨는 순간마다 얼핏 책상 앞에서 졸고 있는 내가 보였다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코고는 소리를 얼른 멈추고 있었다 소매로 입가의 침자국을 닦고 있었다 졸음을 쫓아내려고 머리를 흔들고 열심히 눈을 비비고 헛기침을 하고 있었다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눈을 부릅뜨고 글자에 초점을 맞춘 나는 더 이상 졸지 않고 책에만 집중하였다는 생각 속에서 허겁지겁 빠져나와 침 닦으며 눈 비비며 다시 잠 깨는 나를 보았다 이제야말로 깨어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내 머리통은 또 한쪽으로 꺾이어 있었다 분명히 멈추었다고 생각했던 코고는 소리를 다시 멈추고 있었다 부릅떴다는 생각 속에서 어느새 풀려버린 눈을 다시 번쩍 뜨고 있었다 또렷하게 보였던 글자들이 부랴부랴 허공에서 책 속으로 되돌아오고 ..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 고정희

170)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 고정희 길을 가다가 불현듯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목을 길게 뽑고 두 눈을 깊게 뜨고 저 가슴 밑바닥에 고여 있는 저음으로 목을 길게 뽑고 두 눈을 깊게 뜨고 저 가슴 밑바닥에 고여 있는 저음으로 첼로를 켜며 비장한 밤의 첼로를 켜며 두 팔 가득 넘치는 외로움 너머로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너를 향한 그리움이 불이 되는 날 나는 다시 바람으로 떠올라 그 불 다 사그러질 때까지 어두운 들과 산굽이 떠돌며 스스로 잠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떠오르는 법을 익혔다 네가 태양으로 떠오르는 아침이면 나는 원목으로 언덕 위에 쓰러져 따스한 햇빛을 덮고 누웠고 달력 속에서 뚝, 뚝, 꽃잎 떨어지는 날이면 바람은 너..

팔자 - 반칠환

팔자 - 반칠환 ​나비는 날개가 젤루 무겁고 공룡은 다리가 젤루 무겁고 시인은 펜이 젤루 무겁고 건달은 빈 등이 젤루 무겁다 경이롭잖은가 저마다 가장 무거운 걸 젤루 잘 휘두르니 - 시집(시와 사학사, 2005) === 나에게 젤루 무거운 것이 무엇일까? 그걸 젤루 잘 휘두르다고 하는데, 시를 대하면서 먼저 마음의 무워 온다. 나는 경이로운 삶을 살아 왔는가?

당분간 - 최승자

당분간 - 최승자 당분간* 강물은 여전히 깊이깊이 흐를 것이다 당분간 푸른 들판은 여전히 바람에 나부끼고 있을 것이다 당분간 사람들은 각자 각자 잘 살아 있을 것이다 당분간 해도 달도 날마다 뜨고 질 것이다 하늘은 하늘은 이라고 묻는 내 생애도 당분간 편안하게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 시집(문학과 지성사, 2016) * 당분간 [當分間] : 앞으로 얼마간의 시간에. 또는 잠시 동안에. === 당분간 (당분간 [當分間] : 앞으로 얼마간의 시간에. 또는 잠시 동안에.) 당분간 지금 다니는 직장을 다닐 것이다. 당분간 예쁜꽃을 만나게 될 것이다. 당분간 강물은 흘러흘러 바다로 향해 흐를 것이다. 당분간 푸른 하늘을 보며 걸을 수 있을 것이다 생애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편안하게 흔들리며 살아 갈 것이다.

나무에 대하여 - 이성복

나무에 대하여 - 이성복 때로 나무들은 아래로 내려가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나무의 몸통뿐만 아니라 가지도 잎새도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고 싶을 것이다 무슨 부끄러운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왼종일 마냥 서 있는 것이 부담스러울 때가 있을 것이다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제 뿌리가 엉켜 있는 곳이 얼마나 어두운지 알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몸통과 가지와 잎새를 고스란히 제 뿌리 밑에 묻어 두고, 언젠가 두고 온 하늘 아래 다시 서 보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2008년 5월호 / 시집(문학과 지성사, 2013) ♥ 나무에 대하여 - 이성복 처서가 지나면 나무들은 생장을 멈추기 시작한다고 한다. 위로만 솟아오르려는 상승의 기운을 접고 비로소 자신의 내면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