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이야기/익어가는 하루(필사) 205

눈물 흘려도 돼 - 양광모

눈물 흘려도 돼 - 양광모 비 좀 맞으면 어때 햇볕에 옷 말리면 되지 길 가다 넘어지면 좀 어때 다시 일어나 걸어가면 되지 사랑했던 사람 떠나면 좀 어때 가슴 아프면 되지 살아가는 게 슬프면 좀 어때 눈물 흘리면 되지 눈물 좀 흘리면 어때 어차피 울며 태어났잖아 기쁠 때는 좀 활짝 웃어 슬플 때는 좀 실컷 울어 누가 뭐라 하면 좀 어때 누가 뭐라 해도 내 인생이잖아 - 시집 (이룸나무, 2013) === 시(詩)처럼 살려고 하는데 힘든 삶이네요. 그래도 누가 뭐라해도 내 인생이니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말고 당당하게 살아가자!

검은등뻐꾸기의 전언 - 복효근

검은등뻐꾸기의 전언 - 복효근 5월 봄밤에 검은등뻐꾸기가 웁니다 그 놈은 어쩌자고 울음소리가 홀딱벗고, 홀딱벗고 그렇습니다 다투고는 며칠 말도 않고 지내다가 반쯤은 미안하기도 하고 반쯤은 의무감에서 남편의 위상이나 찾겠다고 쳐지기 시작하는 아내의 가슴께는 건드려보지도 않고 윗도리는 벗지도 않은 채 마악 아내에게 다가가려니 집 뒤 대숲에서 검은등뻐꾸기 웁니다 나무라듯 웁니다 하려거든 하는 것처럼 하라는 듯 온몸으로 맨몸으로 첫날밤 그러했듯이 처음처럼, 마지막일 것처럼 그렇게 하라는 듯 홀딱벗고 홀딱벗고 막 여물기 시작하는 초록빛깔로 울어댑니다 - 『마늘촛불』(애지, 2009) 검은등뻐꾸기 (Indian Cuckoo) 분류 : 척삭동물 > 조강 > 두견목 > 두견과 서식지 : 러시아 동남부에서 인도, 네팔,..

밥과 자본주의 평화를 위한 묵상기도

밥과 자본주의-평화를 위한 묵상기도 - 고정희 어둠이 가득한 세상 속으로 악령이 깃을 치는 땅으로 첫 열 두 제자를 파송하던 날의 그리스도 마음을 묵상합니다 평화를 전하러 가는 너희는 돈주머니를 지니지 말며 평화를 전하러 가는 너희는 양식자루를 지니지 말며 평화를 전하러 가는 너희는 여벌 신발도 지니지 말아라, 분부하신 그 말씀 내 오늘 깨닫습니다 그것이 평화의 길인 줄 그것이 평화의 길인 줄 추수할 곡식은 익어가는데 일꾼이 너무 적구나, 적구나 열두 제자를 파송하는 날의 그리스도 말씀을 묵상합니다 평화를 추수하러 가는 너희는 내 평화를 배척하는 집에 머물지 말며 평화를 추수하러 가는 너희는 내 평화를 모르는 식탁에 앉지 말며 평화를 추수하러 가는 너희는 내 평화를 외면하는 땅에서 묻은 신발의 먼지도 다..

정든 병 - 허수경

정든 병 - 허수경 이 세상 정들 것 없어 병에 듭니다 가엾은 등불 마음의 살들은 저리도 여려나 그 살을 세상의 접면에 대고 몸이 상합니다 몸이 상할 때 마음은 저 혼자 버려지고 버려진 마음이 너무 많아 이 세상 모든 길들은 위독합니다 위독한 길을 따라 속수무책의 몸이여 버려진 마음들이 켜놓은 세상의 등불은 아프고 대책없습니다 정든 병이 켜놓은 세상의 등불은 어둑어둑 대책없습니다. - 시집(문학과 지성사, 1992)

남해 금산 - 이성복

남해 금산 - 이성복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서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 시집(문학과 지성사, 1986)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 정끝별 해설 - 믿음사 돌 속에 묻힌 한 여자의 사랑을 따라 한 남자가 돌 속에 들어간다면, 그들은 돌의 연인이고 돌의 사랑에 빠졌음에 틀림없다. 그 돌 속에는 불이 있고 목마름이 있고 소금이 있고 무심(無心)이 있고 산 같은 숙명이 있었을 터. 팔다리가 하나로 엉킨 그 돌의 형상을 '사랑의 끔찍한 포옹'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런데 왜 한 여자는 울면서 돌..

기억하는가 - 최승자

기억하는가 - 최승자 기억하는가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날 환희처럼 슬픔처럼 오래 큰물 내리던 그날 네가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네가 다시는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평생을 뒤척였다 - 시집(문학과 지성사, 1989) === 사람에게는 '망각'이라는 선물같은 능력이 있다. 그러나 그 능력을 써 먹지 못하는가? 그러므로 님이 톡(카톡)하지 않으므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또 평생동안 난 뒤척일테니

가재미 - 문태준

130) 가재미 ㅡ 문태준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아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아직과 이미 사이 - 박노해

아직과 이미 사이 - 박노해 '아직'에 절망할 때 '이미'를 보아 문제 속에 들어 있는 답안처럼 겨울 속에 들어찬 햇봄처럼 현실 속에 이미 와 있는 미래를 아직 오지 않는 좋은 세상에 절망할 때 우리 속에 이미 와 있는 좋은 삶들을 보아 아직 피지 않은 꽃을 보기 위해선 먼저 허리 굽혀 흙과 뿌리를 보살피듯 우리 곁의 이미를 품고 길러야 해 저 아득하고 머언 아직과 이미 사이를 하루하루 성실하게 몸으로 생활로 내가 먼저 좋은 세상을 살아 내는 정말 닮고 싶은 좋은 사람 푸른 희망의 사람이 되어야 해 - 시 에세이집(해냄, 1997, 초판 / 느린걸음, 2015, 개정판) === 아직 or 이미 = 사람만이 희망이다 사랑하다 죽는 것은 두려운 일이지만 사랑없이 사는 것은 더 두려운 일이지요. 사랑은 죽음보..

아쿠아리움 - 김이듬

아쿠아리움 - 김이듬 오늘처럼 인생이 싫은 날에도 나는 생각한다 실연한 사람에게 권할 책으로 뭐가 있을까 그가 푸른 바다거북이 곁에서 읽을 책을 달라고 했다 오늘처럼 인생이 싫은 날에도 웃고 오늘처럼 돈이 필요한 날에도 나는 참는 동물이기 때문에 대형어류를 키우는 일이 직업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쳐다본다 최근에 그는 사람을 잃었다고 말한다 죽음을 앞둔 상어와 흑가오리에게 먹이를 주다가 읽을 책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사람들은 아무런 할 일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내가 헤엄치는 것을 논다고 말하며 손가락질한다 해저터널로 들어온 아이들도 죽음을 앞둔 어른처럼 돈을 안다 유리벽을 두드리며 나를 깨운다 나는 산호 사이를 헤엄쳐 주다가 모래 비탈면에 누워 사색한다 나는 몸통이 가는 편이고 무리 짓지 않는다 사라..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 반칠환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 반칠환 (속도에 대한 명상) 보도블록 틈에 핀 씀바귀 꽃 한 포기가 나를 멈추게 한다 어쩌다 서울 하늘을 선회하는 제비 한두 마리가 나를 멈추게 한다 육교 아래 봄볕에 탄 까만 얼굴로 도라지를 다듬는 할머니의 옆모습이 나를 멈추게 한다 굽은 허리로 실업자 아들을 배웅하다 돌아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은 나를 멈추게 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멈추게 한 힘으로 다시 걷는다 - 시집, (시와시학사, 2001) === 오늘도 나를 멈추게 하는 것이 무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