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이야기/익어가는 하루(필사) 205

선운사에서 - 최영미

선운사에서 -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건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 시집 (창비, 1994, 초판 / 창비, 2015, 개정판) === 꽃이 지는 것도 꽃을 잊는 것도 슬프네요. 시간이 지나 그 꽃이 다시 새록새록 피어나길 기다리는 아름다운 추억 속에서

햇살에게 / 하늘의 그물 - 정호승

햇살에게 - 정호승 이른 아침에 먼지를 볼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내가 먼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먼지가 된 나를 하루 종일 찬란하게 비춰 주셔서 감사합니다 - 시집(창비, 1999) 하늘의 그물 - 정호승 하늘의 그물은 성글지만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다만 가을밤에 보름달 뜨면 어린 새끼들 데리고 기러기들만 하나 둘 떼 지어 빠져 나갑니다 - ‘내가 사랑하는 사람’ 중에서 === 티끌 같은 나에게 책을 읽고, 생각을 키울 수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티끌 같은 나에게 지금까지 보호하시고, 지켜주심을 감사합니다. 이젠 나에게 찬란한 의의 태양되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저녁별처럼 - 문정희

저녁별처럼 - 문정희 기도는 하늘의 소리를 듣는 것이라 저기 홀로 서서 제자리 지키는 나무들처럼 기도는 땅의 소리를 듣는 것이라 저기 흙 속에 입술 내밀고 일어서는 초록들처럼 땅에다 이마를 겸허히 묻고 숨을 죽인 바위들처럼 기도는 간절한 발걸음으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깊고 편안한 곳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저녁별처럼 - 시집(초판, 불, 2007 / 복간판, 민음사, 2016) === 저녁별처럼 빛난 삶이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하늘의 소리 땅의 소리 우리가 정말 들을 수 있다면 겸손하게, 자연스럽게, 잘 듣고 살아 가야 한다.

나평강 약전 - 나희덕

나평강 약전(略傳) - 나희덕 그는 얼마간의 가축을 키웠다 병아리들을 부화시켜 마당에 놓아먹였고 입덧이 심한 아내를 위해 얼룩염소 한 마리를 사다가 젖을 짜 먹였다 염소가 언덕에서 풀을 뜯을 때 가만히 앉아 무슨 생각인가를 하염없이 하는 사람이었다 염소가 풀을 다 뜯은 후에도 멀리서 들려오는 피리 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었다 언덕의 풀처럼 나지막하고 바람에 잘 쓸리는 사람이었다 닭 키우는 것을 좋아했지만 죽은 닭은 잘 만지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갓 난 달걀과 마악 짜낸 염소젖, 생전에 그가 식구들에게 건네 준 전부였다 그보다 따뜻한 것을 알지 못한다 ​ - 계간, 2018년 봄호 === 나의 과거로 돌아가게 하는 시(詩)인 것 같다. 어릴 적 고향 집 마당에 소, 염소, 닭, 토끼를 키우던 시절로,,, ..

간단한 부탁 - 정현종

간단한 부탁 - 정현종 지구의 한쪽에서 그에 대한 어떤 수식어도 즉시 미사일로 파괴되고 그 어떤 형용사도 즉시 피투성이가 되며 그 어떤 동사도 즉시 참혹하게 정지하는 전쟁을 하고 있을 때, 저녁 먹고 빈들빈들 남녀 두 사람이 동네 상가 꽃집 진열장을 들여다보고 있는 풍경의 감동이여! 전쟁을 계획하고 비극을 연출하는 사람들이여 저 사람들의 빈들거리는 산보를 방해하지 말아다오. 저 저녁 산보가 내일도 모레도 계속 되도록 내버려둬 다오. 꽃집의 유리창을 깨지 말아다오. - 시집(문학과 지성사, 2013) === 우리네 삶의 행복이란? 평범한 일상이 계속되며, 언제나 여행하는 것처럼 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평범한 일상에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 할 때 행복이 올 것이다.

문상 - 박준

문상 - 박준 한밤 울면서 우사 밖으로 나온 소들은 이곳에 묻혔습니다 냉이는 꽃 피면 끝이라고 서둘러 캐는 이곳 사람들도 여기만큼은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냉이 꽃이 소복을 입은 듯 희고 머지않아 자운영들이 와서 향을 피울 것입니다 - 시집 (문학과 지성사, 2018) === 냉이 꽃의 꽃말 = 봄 색시, 당신께 나의 모든 것을 드립니다. 자운영의 꽃말 = (탄생화 - 감화) 감화, 나의 행복, 그대의 관대한 사랑

당신의 눈물 - 김혜순

120) 당신의 눈물 - 김혜순 당신이 나를 스쳐보던 그 시선 그 시선이 멈추었던 그 순간 거기 나 영원히 있고 싶어 물끄러미 물 꾸러미 당신 것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내 것인 물 한 꾸러미 그 속에서 헤엄치고 싶어 잠들면 내 가슴을 헤적이던 물의 나라 그곳으로 잠겨서 가고 싶어 당신 시선의 줄에 매달려 가는 조그만 어항이고 싶어 - 시집(문학과 지성사, 2008) === 나는 당신을 스쳐보던 그때 그 시선 그 시선이 머물고 있던 그 순간 그곳에 당신과 함께 영원히 있고 싶어. 당신을 본 그 시선 속에 그 속에 잠기고 싶어.

로또를 안 사는 건 나쁘다 - 최금진

로또를 안 사는 건 나쁘다 - 최금진 로또가 얼마나 끔찍한 악몽인지 로또방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끝자리를 분석하거나 홀수 짝수를 조합하는 일은 어느 사무직과 다르지 않다. 왜 사느냐,를 왜 로또를 사느냐,로 이해해도 무관하다 이 늦은 밤에 왜 또 여기로 왔는가, 자신에게 돌아오는 질문을 쓰레기통에 구겨 넣으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번호를 찍는다 로또를 사지 않는 10%의 고소득층은 얼마나 좋을까 로또를 사지 않아도 천사가 지켜주니까 왜 사느냐,를 묻지 않아도 되니까 오십이 넘은 사내는 누가 볼까봐 손을 가리고 찍는다 술냄새에 절어 들어온 사내는 앉자마자 묵상을 한다 갓 스물을 넘긴 청년은 줄을 서지 않는 자들을 무섭게 흘겨본다 순서를 어기는 것은, 누군가 자신을 앞서가는 것은 견딜 수 ..

로또를 포기하다 - 복효근

로또를 포기하다 - 복효근 똥을 쌌다 누렇게 빛을 내는 굵은 황금 똥 깨어보니 꿈이었다 들은 바는 있어 부정 탈까 발설하지 않고 맨 처음 떠오르는 숫자를 기억해두었다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려운 두 누나 집도 지어주고 자동차를 바꾸고 아내도 아니, 아내는 이쁜 두 딸을 낳아주었으니 남 보는 눈도 있고 하니 좀 더 생각해볼 것이다 직장도 바꾸고 물론 시도 쓰지 않을 것이다 제대로 쓰지도 못하면서 시인이라는 이름이 버겁기만 하고 머리털 빠지는 그 짓을 뚝심 좋은 이정록 같은 이에게나 맡길 것이다 내일 퇴근 길에 들러서 사올까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어디서 로또를 사지 또 뭐라고 말해야 할까 똥 꿈을 꾸었다고 쑥스럽게 그건 그렇고 내가 부자가 되면 화초에 물은 누가 줄 것이며 잡초는 어떻게 하고.......

내 삶의 예쁜 종아리 ㅡ 황인숙

내 삶의 예쁜 종아리 ㅡ 황인숙 오르막길이 배가 더 나오고 무릎 관절에도 나쁘고 발목이 더 굵어지고 종아리가 미워진다면 얼마나 더 싫을까 나는 얼마나 더 힘들까 내가 사는 동네에는 오르막길이 많네 게다가 지름길은 꼭 오르막이지 마치 내 삶처럼 - 계간 2016년 가을호 === 오르막 내리막 연속인 인생! 오르막을 오를 때, 우리는 더 희망을 가지게 된다. 나의 인생에도 조그만 더 오르면 오르막이 끝나리라는 기대와 희망으로 날마다 걸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