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122

내가 가장 예뻤을 때 - 이바라기 노리코

내가 가장 예뻤을 때 - 이바라기 노리코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거리는 와르르 무너져 내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푸른 하늘 같은 것이 보이곤 하였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주위 사람들이 무수히 죽었다 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도 없는 섬에서 난 멋 부릴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아무도 다정한 선물을 건네주지 않았다 남자들은 거수경례밖에 모르고 해맑은 눈길만을 남긴 채 모두 떠나갔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 머리는 텅 비어 있었고 내 마음은 굳어 있었고 손발만이 밤색으로 빛났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 나라는 전쟁에 패했다 그런 어이없는 일이 있단 말인가 블라우스 소매를 걷어붙이고 비굴한 거리를 활보하였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라디오에서 재즈가 넘쳐흘렀다 금연을 깨뜨렸을 때처럼 어질어질하면서 난..

옛날 시인 -- 최영미

옛날 시인 -- 최영미 그는 걷는다. 타락한 도시의 시궁창에 코를 박고 달콤한 향수에 숨은 지독한 사연들, 방금 구워진 소문들을 염탐하고 백화점 스카이라운지에 웅크린 권태와 일요일의 경멸, 성공하지 못한 계산과 자포자기의 살의(殺意)를 목격하는 그는 불행과 고통의 친구이며 망설이는 자들의 이웃, 어쩔 수 없이 사랑에 빠진 이들의 후원자. 미지의 바다를 탐험하며 항구마다 애인을 만들고 잠 못 이루는 밤이면 연인의 품에서 잠들기도 하지만 다음날 아침이면 벌써 고독이 그리워 창문을 열어제낀다 시멘트벽에 흩어지는 빛과 바람을 모아 가난한 언어의 그물을 짠다 운이 좋아 그가 성공하면 푸른 창공을 가르는 한 줄기 영롱한 구름처럼 노래가 솟아오른다. 지상의 어느 보석도 그 앞에선 시들해질.... - 시집(이미, 20..

남몰래 오줌을 누는 밤 - 안명옥

남몰래 오줌을 누는 밤 - 안명옥 놀라워라, 호프집에서 술을 마시고 늦은 밤 집으로 돌아간다 참지 못할 만큼 오줌이 마려워 걸음이 평소보다 급하다 오줌 마려운 것이, 나를 이렇게 집 쪽으로 다급하게 몰고 가는 힘이라니! 오줌이 마렵지 않았다면 밤 풍경을 어루만지며 낮엔 느낄 수 없는 밤의 물컹한 살을 한 움큼 움켜쥐며 걸었을 것을 아니 내 눈길이 보이지 않는 어둠 저편, 그 너머까지 탐색했을 지도 모를 것을 지금 내게 가장 급한 것은 오줌을 누는 일 지나가는 사람들 없는 사이 무릎까지 바지를 끌어내리고 오줌을 눈다 오줌을 누는 것은 대지와의 정사 혹은 내 속의 어둠을 함께 쏟아내는 일, 그리하여 다시 오줌이 마려워오는 순간이 오기까지 내 속이 잠시나마 환해지는 일 변기가 아닌, 이렇게 아파트 단지의 구석..

설날 집합금지 (2021년 2월 12일 설날)

설날 집합금지 전화벨이 울린다. 시골 내려가려고 준비하다가 전화를 받는다. 어머니가 전화를 하셨다. 이번 설에는 내려오지 말란다. 5인 이상 집합금지이고 하니, 각자 집에서 보내자고 하신다. “출발하지 않았으면 오지마라.” “서로 다니다가 아프면 안 되니 오지마라.” 우리 삼남매는 시골 간다고 좋아하다가 모이자말자는 할머니의 말에 실망하고 주저 않는다. 왜 이런 상황까지 왔나. 누구를 탓하지도 못하고 이 현실을 받아들려야 하니 마음이 아프다. 소중한 인생살이 한 번 사는 인생이 무엇이 두려운가? 벌금이 무서워서인가? 아니면 정말 건강한 삶 때문에 못가는 건가? 고향에도 못가고 마음은 서글프다. 딸 둘과 아내만 부모님께 방문하기로 하고 잠을 청하려고 한다. 시끌벅적한 설날 분위기를 상상할 수 없는 이번 설..

흐린 날이 난 좋다 - 공석진

흐린 날이 난 좋다 - 공석진 흐린 날이 난 좋다 옛사랑이 생각나서 좋고 외로움이 위로받아서 좋고 목마른 세상 폭우의 반전을 기다리는 바람이 난 좋다 분위기에 취해서 좋고 눈이 부시지 않아서 좋고 가뜩이나 메마른 세상 눅눅한 여유로움이 난 좋다 치열한 세상살이 여유를 갖게 해서 좋고 가난한 자 마음 한 켠 카타르시스가 좋다 그리움을 그리워하며 외로움을 외로워하며 누군가에 기대어 쉴 수 있는 빈 공간을 제공해 줘서 흐린 날이 난 좋다 - 시창작법(청어, 2020)

정말 사과의 말 - 김이듬

정말 사과의 말 - 김이듬 만지지 않았소 그저 당신을 바라보았을 뿐이오 마주볼 수밖에 없는 위치에 놓여 있었소 난 당신의 씨나 뿌리엔 관심 없었고 어디서 왔는지도 알고 싶지 않았소 말을 걸고 싶지도 않았소 우리가 태양과 천둥, 숲 사이로 불던 바람, 무지개나 이슬 얘기를 나눌 처지는 아니잖소 우리 사이엔 적당한 냉기가 유지되었소 문이 열리고 불현듯 주위가 환해지면 임종의 순간이 다가오는 것이오 사라질 때까지 우리에겐 신선도가 생명으로 직결되지만 묶고 분류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한 칸에 넣었을 것이오 실험해보려고 한 군데 밀어 넣었는지도 모르오 당신은 시들었고 죽어가지만 내가 일부러 고통을 주려던 게 아니었기 때문에 난 죄책감을 느끼지 않소 내 생리가 그러하오 난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의 생기를 ..

난초를 더 주세요 ㅡ 김이듬

난초를 더 주세요 - 김이듬 엄마가 떠날 때 내가 엄마를 불렀을 때 그녀는 트렁크를 들고 현관문을 여는 찰나였다 이 층 계단에서 나는 뛰어 내려왔다 넘어졌다 몇 계단을 구르고 보니 동네 도랑가에 있었다 내 이마에는 그때 생긴 흉터가 있다 웃기지 마라 트라우마는 없다 비상구다 평소에는 앞머리로 커튼처럼 가리고 다니지만 기분 좋은 날엔 향기로운 동양란처럼 생긴 흉터를 밀고 내 마음의 정원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엄마는 히아신스를 만지고 있다 그녀는 외국 물건을 좋아했다 우리는 같이 파랑새를 부르고 장미과자를 먹고 들장미 덤불을 손질한다 비 오는 밤 죽은 엄마가 내 이마를 쓰다듬고 내 이마로 잠입하는 순간 나는 신열이 나서 아름답고 몽환적인 자장가를 듣는다 - 시집(문학과지성사, 2014)

살아 있다는 것 ㅡ 드니스 레버토프

살아 있다는 것 ㅡ 드니스 레버토프 잎사귀와 풀잎 속 불이 너무 푸르다, 마치 여름마다 마지막 여름인 것처럼 바람 불어와, 햇빛 속에 전율하는 잎들, 마치 모든 날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연약한 발과 긴 꼬리로 꿈꾸는 듯 움직이는 붉은 색 도롱뇽 너무 잡기 쉽고, 너무 차가워 손을 펼쳐 놓아 준다, 마치 매 순간이 마지막 순간인 것처럼 ㅡ 시집(류시화 엮음, 수오서재, 2020)